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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차량 부주의로 여중생 2명 사망’

‘미선이·효순이 사건’으로 알려진 중학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2002년 6월13일은 전국동시 지방선거일이었다. 앞서 5월31일 한일 월드컵 개막 후 우리나라 월드컵 축구 대표팀과 포르투갈 팀의 조별 예선 경기를 하루 앞둔 날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은 미군 장갑차가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마을 도로를 주행하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 2명을 치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오마이뉴스 등에서 사고 당일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지만 대부분의 일간지는 다음날 관련 기사를 단신으로 처리했다. 조선일보는 이마저도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기자들에 따르면 이날은 지방선거일이어서 사건 기자들도 아침부터 선거 관련 취재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 의정부경찰서로 한 장의 팩스가 들어왔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즉사.’ 그때 기자들의 입에서는 “하필 오늘같이 바쁜 날…”이라는 푸념이 나왔다.

다음 날 신문에는 ‘미군차량 치여 여중생 2명 사망’(한겨레), ‘미군 차량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경향신문), ‘미군 궤도차 덮쳐 여중생 둘 사망’(중앙일보) ‘미군차에 치여 여중생 둘 사망’(동아일보) 등 경찰발 기사가 지면 구석에 짤막하게 실렸다.

지난 2002년 7월3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49재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효순·미선양 영정을 앞세우고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002년 7월3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49재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효순·미선양 영정을 앞세우고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2002년 12월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여중생 압사사건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민언련의 일간지(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한겨레) 보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6월17일 미군 측이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서둘러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어느 신문도 제대로 문제제기 하지 않았다.

민언련은 “6월20일에는 미국의 일방적인 자체 조사결과가 한미 합동으로 발표됐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겨레만 21일자 사회 2면 2단으로 단순 보도했을 뿐 그 방식과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지 못한 한계를 남겼다”며 “미군 측이 최소한의 사과도 하지 않고 사고 차량 운전병은 아무런 처벌 없이 군내 생활을 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추이가 계속됐지만 이에 대해 언론은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사건 초기 조선일보의 침묵은 은폐 수준에 가까웠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난 6월20일이 돼서야 미군 추모행사를 첫 보도한 조선일보는 7월부터 미군 측의 입장을 중점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고심 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사망 사건 관련해 쓴 사설의 첫 시작은 “내년은 한·미 군사동맹 50주년이 되는 해다”였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한·미 동맹관계는 이제 그 연륜에 걸맞은 성숙함을 갖출 때가 됐으며, 건강한 동맹을 유지하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라며 “이 사건이 일종의 ‘운동 확산’의 모양새로 가게 하는 양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같은 경향은 피해자 가족들이나 한·미 양국 국민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그동안 이 사건 보도에 소홀했던 이유를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결국 조선일보는 사고 발발 직후 미군 측의 무책임한 태도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국민의 억울한 죽음이 규명되지 않았는데도 피해자 국민을 위로하기보다 한·미 관계 악화를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언론의 무관심 속 미군 장갑차에 중학생 2명이 스러졌다

반면 한겨레는 6월20일 ‘미군훈련과 두 소녀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일찌감치 불평등한 SOFA 규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겨레는 “미군 주둔과 군사훈련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 해도, 이런 어이없는 안전사고를 ‘공무 중 다반사’로 처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미8군이 소녀들의 죽음에 조의를 표시하고 위로 모금을 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것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을 좀 더 평등하게 개정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또 미군이 설치한 고압선에 감전돼 팔다리를 자른 채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 장갑차 사건 사흘 전 세상을 떠난 전동록씨 사례를 들며 “그 사건에 대해서도 미군당국은 ‘과실치사’라며 단돈 60만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을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빈발하는 안전사고를 줄이는 길은 사고에 대한 투명한 조사와 엄격한 처벌”이라며 “우리 국민에게 피해를 준 사건의 조사에 우리의 사법당국이 참여해야 함은 당연하다”고 주문했다.

지난 2007년 6월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선이, 효순이 5주기 촛불 문화제' 행사에 시민들이 참석해 심미선·신효순양 사망 5주기를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007년 6월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선이, 효순이 5주기 촛불 문화제' 행사에 시민들이 참석해 심미선·신효순양 사망 5주기를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인철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은 6월26일 경향신문 기고문(월드컵에 묻힌 것들)에서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미군이 공무수행 중 발생한 사고라며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끝내려 한다는 것과 우리가 재판관할권 조차 없다는 것”이라며 “더욱 기막힌 일은 이 사고에 대해 항의하러 간 우리 여고생들과 시민단체에 무릎을 꿇고 사죄해도 시원찮을 미군이 무장한 채 총부리를 들이댔다는 것이다. 미군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개탄했다.

미군이 사고 발생 후 유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서둘러 현장조사를 벌인 후 “사고 차량 차장이 30m 앞에서 여중생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두 차례 운전병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지만 소음으로 듣지 못했다”는 발표도 결국 허위로 밝혀졌다. 미군은 “훈련을 주민들에게 미리 통보했다”고 거짓말했다가 주민의 항의를 받고서야 “다음부터 꼭 알리겠다”며 번복하기도 했다.

한겨레 등 보도에 따르면 실제 장갑차량 운전병은 미군 조사에서 사고 당시 다른 곳과 교신해 선임 탑승자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7월2일 운전병 워커 마크 병장은 “사고 당시 중대장, 지휘부와 무전교신을 하고 있었다”며 “선임 탑승자가 ‘정지’라고 고함지르는 것을 들었을 때 차량 오른쪽 바로 앞에 빨간 셔츠를 입은 소녀를 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11월 한국 검찰은 운전병과 관제병이 통신장비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장갑차량을 운행하는 등 명백한 과실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사용한 장비를 조사한 결과 통신장비에 여러 결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관련자 진술과 장비 상태 등을 놓고 볼 때 이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장갑차를 출발시키고 운행을 계속해 사고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 군사법원 배심원단은 운전병과 관제병 모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미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고 초기 일부 언론이 지적했듯 미군이 ‘과실치사’를 입증하고 유족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표하는 방법은 공정하고 철저한 재조사였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원만한 처리’와 한미동맹 강화를 내세우며 되레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대의 과격성을 우려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검찰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고의성이 없는 과실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예단했다.

▲ 지난 2005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고 신효순 심미선 3주기촛불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민중의소리
지난 2005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고 신효순 심미선 3주기촛불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민중의소리
6월27일 희생 학생 유가족 측이 사고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 중대장 등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고소한 후 동아일보는 29일자 사설에서 학생들의 죽음을 ‘교통사고’에 비유했다.

동아일보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살인과 교통사고 등에 의한 과실치사는 법률적으로도 엄연히 구분된다”며 “조사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번 사고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여학생 강간 사건이나 주한미군 영안실에서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한 범죄와는 달리 고의성이 없는 과실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동아일보는 “일부 시위대가 미군기지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미군 병사 9명이 다쳤다”고 하면서도 미군의 공개 사과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취재 기자가 폭행당한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민의 정서를 감안해 유족들 위로 △충분한 보상 △유사 사고 재발 방지 노력을 ‘원만한 처리’라고 하면서도 SOFA 규정의 문제점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던 동아일보는 11월20일 미군 군사법원 배심원단이 미군 장갑차 관제병에게 무죄 평결을 내리자 그제야 ‘이래서 SOFA 개정하자는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는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자는 격이다.

동아일보는 “이번 사건의 경우 한국 검찰은 미군 측에 재판관할권 포기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 결과 전원 미군 장병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놓았고 그것이 한국민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라며 “이번 불행한 사고가 SOFA 개정 등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지금껏 SOFA 개정을 요구해 온 시민단체엔 ‘지나친 반응은 잘못’이라는 훈계도 빼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식 ‘원만한 처리’가 되지 않은 것은 정부·여당의 책임도 큰데도 이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목소리로 평결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정치권과 법무부가 국민의 질타를 함께 받고 있는데도 동아일보는 모른 체했다.

의문사를 ‘교통사고’로 치부한 언론, 미군을 변호했다

무력한 한국 정부를 대신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집회를 열고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요식행위’라며 재판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미군 2사단 앞으로 몰리는 시민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경찰에 둘러싸여 집단으로 구타당한 시민은 호흡곤란 상태에서 사진기자들에 의해 발견돼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과 집회 현장 사이를 구급차가 7차례나 다녀갔으며, 이미 쓰러진 여학생을 발로 짓밟고 방패로 머리를 내리찍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분을 못 이겨 실신한 대학생도 있었겠는가.”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을 묘사한 한겨레 사설 중 일부다. 한겨레는 11월24일 사설에서도 시위대의 분노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 정부의 태도에도 겨누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이번 평결 결과를 두고 ‘재판을 투명하게 진행하려는 미군 당국의 노력을 평가하며, 이와 같은 결과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외교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 외교부냐”며 “정부는 언제까지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뜻을 알았다면 바로 소파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 소파 재협상의 뜻을 밝힌 각 당도 빈말에 머물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 기간 미군 장갑차 사건 관련 한겨레의 보도량도 급증했다. 지난 2003년 발표된 ‘미군장갑차사건의 담론분석 :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기사 비교’(정선희) 석사학위 논문을 보면 한겨레는 6월에 9건, 7월 43건 8월 25건, 9월 9건, 10월에 6건을 보도했다. 이후 11월18일 가해자인 미군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보도량은 11월은 53건, 12월엔 134건으로 늘었다.

한겨레가 이 사건에서 주로 사용한 ‘프레임’(frame·틀 짓기)은 한미 간 불평등 관계를 강조하고 SOFA 개정을 주장하는 ‘패권국·SOFA 개정’과 촛불시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미확산’ 프레임이었다. 반면 조선일보는 한미 동맹의 틀 안에서의 SOFA 절차 조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동반자·법률체계’와 ‘반미저지’ 프레임 비중이 컸다.

특히 한겨레는 미군 장갑차 사건에서 미국을 패권국의 오만한 이미지로 부각하고 책임자의 처벌과 SOFA 개정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패권국·SOFA 개정’ 프레임이 67.9%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이 사건 초기부터 자리 잡은 ‘패권국·SOFA 개정’ 프레임은 ‘반미확산’ 프레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이는 11월 ‘미군 무죄’ 보도 이후 촛불집회가 미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사건 관련 시위가 이미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SOFA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시민단체 위주의 행동이었다면, 11월 이후의 촛불시위는 그동안 미국에 대한 큰 반감이 없었던 일반 시민이나 대학생·청소년층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난 2015년 6월13일 미선효순추모비건립위원회 등 10여개 단체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심미선 양의 13주기 추모제를 열기위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사고 현장까지 영정을 들고 가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지난 2015년 6월13일 미선효순추모비건립위원회 등 10여개 단체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심미선 양의 13주기 추모제를 열기위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사고 현장까지 영정을 들고 가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반미’ 촛불 끄려 했던 조선일보, 미군 무죄·SOFA 불변

이런 흐름에 조선일보는 국가 안보나 경제 상황, 동맹 관계 유지를 위해 반미 정서를 억제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맞섰다. ‘[반미·북핵] 외국인 투자심리 움찔… 증시에 부정적’(12월14일), ‘“한국상품 불매·미 자본철수 등 악영향” 재계, 반미운동 자제 호소…경제5단체 성명’(12월17일), ‘[사설] 경제5단체의 반미 걱정’(12월18일) 등 반미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국익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내용의 기사가 연일 쏟아졌다.

게다가 12월11일 ‘어린이에게 혈서 쓰게 하는 분위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한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 재판을 다시 하라고 요구하며 혈서를 썼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반미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다.

조사결과 학교나 주변에서 이 어린이들에게 ‘혈서’를 부추긴 사람들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12월18일자 칼럼에서도 “어린이에게 시위 현장이나 유세장의 경험이 나중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지, 아이가 자라면서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갖는 데 그런 경험이 장애가 되지는 않을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라며 그때 시국에서 어린이들조차 느꼈던 미국에 대한 분노를 ‘위험한 정치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평화로운 촛불집회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 추모제’를 바라보는 보수 언론의 시각이 당시 얼마나 우려스러웠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지금은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심지어 유모차까지 끌고 나오는 게 촛불 문화제의 상징적인 모습이 됐지만, 광화문을 둘러싸고 있는 보수언론에게 촛불의 번짐은 ‘위기감’을 주는 일이었다.

보수언론은 꽃도 채 피워보지 못한 만 14살 중학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건을 ‘교통사고’ 수준으로 깎아내리고 진상을 호도했다. 주한미군, 나아가 미국과의 본질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진실을 밝혀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하기보다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반미 감정의 확산을 막는 프레임으로 진실을 가렸다.

다음은 지난 2015년 신경림 시인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신효순·심미선양 13주기 추모제에서 낭송한 추모시 ‘다시 그날은 오는데’ 중 일부다.

‘산과 들을 말리고 나무와 곡식을 태우면서

또 유월이 왔구나.

효순이 미선이 너 귀여운 우리의 딸들을

우리가 이 땅에 되살려야 할 유월이 왔구나.

이제 거꾸로 너희가 별이 되어

우리 갈 길을 가리켜주는 유월이 왔구나.

우리의 꿈을 지켜주고

쓰러지려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다시 그날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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