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65·구속기소)의 혐의 전면 부인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재판의 막이 올랐다. ‘삼성 뇌물’, ‘문화계 블랙리스트’,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강요’ 등 국정농단 주도 혐의를 둘러싸고 향후 5개월 여간 검찰과 박씨 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질 예정이다. 박씨 측이 “정치재판” 문제를 언급함에 따라 향후 수사 공정성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여지가 높다.

박씨의 국정농단 사건 제1회 공판이 23일 오전10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의 심리로 3시간 가량 진행됐다.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출석한 것은 지난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판이 열린 이래 21년 만의 일이다.

박근혜 “나는 모른다”

박씨는 18가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시초가 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774억원 강제 모금의 경우, 박씨는 재단 설립을 지시한 사실이 없고 ‘직권남용의 피해자’가 기업 법인인지 대표이사 혹은 관계 임원인지 불명확하다는 입장이다. 박씨의 법률대리인 유영하 변호사는 이날 법정에서 “2015년 2월 경부터 방기선 청와대 행정관이 안종범 전 정책조적 수석의 지시에 따라 10대 그룹을 대상으로 30억 씩 모으는 재단 설립 계획서를 작성했다”면서 “이 문서는 어떻게 설명 가능한가? 대통령 지시로 재단이 설립됐다는 검찰의 기본 전제가 틀렸다”고 주장했다.

▲ 박근혜씨가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최순실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함께 출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박근혜씨가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최순실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함께 출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유 변호사는 가장 중대한 혐의인 433여억 원 삼성그룹 뇌물 건에 대해서 “(최씨와 박씨 간) 구체적인 모의가 드러난 게 없다”고 말했다. 특검 측 핵심 증거인 안 전 수석 수첩에 대해 그는 “검찰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게 안종범 수석 업무수첩이다. 2015년 7월25일 면담 후 ‘빙상협회 메달리스트 지원’ 문구가 있는데 이를 영재센터 후원금 뇌물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며 “그러나 어떠한 안종범의 진술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최씨의 요구로 롯데그룹으로부터 75억 원을 수수하고 SK에 80억 원을 요구한 적도 없다는 입장이다. 유 변호사는 “(박씨는) 신동빈 회장으로부터 어떠한 청탁을 받은 사실도 없고 롯데에게 75억 원을 부탁한 사실도 없다”면서 “SK그륩은 현안인 면세점 선정에서 탈락했으며 대통령은 (최재원 부회장) 특별사면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청탁받은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최씨의 이권취득 사업을 위해 현대자동차그룹, KT, 포스코, 그랜드코리아레저 등에 각종 계약 체결을 강요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7건에 대해서도 결백을 주장했다. 한 예로 현대차로 하여금 최씨 지인의 회사 KD코퍼레이션과 사업 계약을 체결토록 한 혐의에 대해 박씨 측은 “KD코퍼레이션의 기술이 현대차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지 납품을 지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유 변호사는 박씨가 최씨에게 대통령 해외 순방 일정, 각종 대통령 말씀 자료 등 공무상 비밀 문건 47건을 유출한 혐의도 “연설문 문구에 대해서 의견을 들어보라고 지시한 적은 있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사문제 등의 문건은 정호성 비서관을 통해서 최씨에게 주라고 지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변론, 김기춘·이재용·최순실 변론의 종합판

유 변호사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공소제기를 “사형수 어머니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라 말했다. 검찰은 박씨가 대통령주재 비서관 회의 당시 ‘좌편향 단체’에 대한 지원 배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공소장에 기재했다. 이에 대해 유 변호사는 ‘이 말 한마디에 지금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일련의 책임을 묻는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박씨는 공범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박씨는 “(배제 명단에 대해) 문화예술계 지원에서 배제하라 지시하거나 보고 받은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다.

유 변호사는 ‘표적 배제’ 기조에 따르지 않은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에 대해 “1급 공무원은 관련 법상 신분 보장이 안되는 직위”라며 “정부가 바뀌면 사표를 내거나 후배들에 대한 용퇴를 이유로 물러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께서 김기춘 실장과 인사수석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김 전 실장이 펴고 있는 논지와 동일하다.

“이 사건 공소사실은 엄격한 증명에 따라 기소된 것이 아니라 추론과 상상에 기인한 것”이란 박씨 측 입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측의 주장과 동일하다. 유 변호사는 “공소장 어디를 봐도 최순실과 안종범이 언제 어디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공모했다는 공모관계 적시가 없다”고 말했다.

삼성 측은 특검이 언론보도를 증거로 제출한 것에 대해서도 부동의를 한 바 있다. 재판부는 “그런 보도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지 혐의 입증을 위한 증거가 아니”라는 특검 측 주장을 받아들여 증거로 채택했다.

유 변호사는 검찰 측 기사 증거제출에 대해 “증거 책자만 해도 5책인데 상당수가 언론 기사”라면서 “언제부터 대한민국 검찰이 언론 기사를 형사사건의 증거로 제출했는지 되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정치재판” 공격,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듯

최씨 측은 이 재판을 ‘정치재판’이라고 노골적으로 규정했다. 최씨 측 이경재 변호사는 “(국정농단) 의혹은 최대한 부풀려진 상황이었고 촛불시위로 수사애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면서 “검찰과 특검은 정치사회적 여건 변화에 따라 어떤 때는 직권남용으로, 더 강경한 입장일 때는 삼성 뇌물로, 또 롯데·SK를 선별해서 뇌물로 하는 변화무쌍한 기소를 남용했다”고 주장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 박근혜씨가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최순실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함께 출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 변호사는 이어 시민단체 ‘투기자본감시센터’ 고발건이 수용된 것에 대해 “특검은 투기자본감시센터 쪽으로 선회해 삼성 부분만 (뇌물죄로) 해서 삼성그룹의 현안과 연결시키는 묘수 아닌 묘수를 발휘했다”며 “특수본 2기는 특검 기조에 동조해 이미 수사를 종료한 롯데와 SK를 새로운 뇌물죄로 기소하는 대단한 기민함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검찰 측 이원석 부장검사는 “우리는 정치 상황에 따라서, 집회에 따라서 기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법률가다. 법과 원칙, 법령, 사실관계, 증거 외에 고려할 것은 하나도 없다”면서 “검찰 수사부터 재단 출연금 외에 추가로 출연금을 요구받은 기업에 대해서는 뇌물 혐의를 두고 수사했다. 삼성, 롯데, SK 이렇게 세 개였다”면서 “그 이후에 특검에 수사 기록 일체를 넘겼고 그걸 토대로해서 특검이 삼성 그룹에 뇌물죄를 적용했다. 우리는 다시 특검에서 인계 받은 SK, 롯데 기록을 상세히 검토해 추가로 수사해서 뇌물죄 적용한 것”이라 반박했다.

한웅재 부장검사는 이어 “이 사건 심리와 관계없는 촛불시위와 정치 지형 언급은 부적절하지 않느냐”며 “재판장님께서 (변호인 측이) 자제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증거 없이 죄를 엮었다’는 주장은 최씨 뿐만 아니라 이 부회장 등 뇌물 관련 피의자 대부분이 취하는 입장이다. 이 부장검사는 이에 대해 “피고인들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다 부인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경우에는 공모관계와 그 범위는 다양한 인적·물적 증거에 의해서 간접 증거로 충분히 유죄 입증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대법원의 판례”라고 밝혔다.

‘정치재판’이란 꼬리표는 1심 종결 시점으로 예상되는 10월17일 경까지 따라붙을 것으로 보인다. 유 변호사는 발언 도중 “모두진술에서 공소장 이외에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며 “이 재판이 정치재판이 될까 혹여 두려워 (이외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소사실 외 언급할 사항이 있으나 우선 자제했다는 취지로, ‘정치재판’이라는 최씨 측 주장에 공감을 표한 것으로 읽힌다. 오는 10월17일은 박씨의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때다.

‘고영태 기획 폭로설’ 또 나와

‘고영태 기획 폭로설’ 및 ‘태블릿PC 조작설’이 어김없이 제기됐다. 최씨가 기소된 사건 재판에서 빠짐없이 등장한 최씨 측 변론이다.

이 변호사는 재판 말미에 “미르·K재단 출연금 강요 관련 사건 재판을 27차, 6개월에 걸쳐 했는데 현재까지 검찰은 국정농단의 기폭제라고 하는 태블릿PC 현물을 피고인에게 제시한적이 없다”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김수현(전 고원기획 대표), 류상영(전 더블루케이 부장), 고영태 전 더블루케이 상무 일당의 대화 녹음파일이 2300여 개가 있다는 걸 검찰이 알았다. 재판장님 증거제출을 허락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재판부가 “그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제지하자 이 변호사는 “고영태가 이 사건을 기획 폭로하기 전에 현직 검사와 논의했다는 내용이 (파일에) 분명히 나온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그 문제는 충분히 이야기했고 태블릿 PC는 아직 증거로 채택이 안됐고 (변호인 측) 증인은 증인들이 불출석해서 그런 거 잘 아시지 않느냐”고 답했다.

최순실 “대통령 나오시게 해 너무 큰 죄인”

최씨는 이날 박씨를 변호하며 울먹였다. 최씨는 이 변호사의 변론 후 재판부로부터 발언권을 받고 “내가 이 재판장에 40여 년간 지켜본 대통령을 나오시게 한 것이 너무 많은(큰) 죄인 것 같다”며 “박 대통령은 절대 뇌물이나 이런 걸로 나라를 움직이거나 하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검찰이 몰고가는 행태”라고 주장했다. 이경재 변호사를 사이에 두고 앉은 최씨와 박씨는 3시간 동안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정면이나 바닥만 응시했다.

최씨와 신동빈 회장도 각각 뇌물수수 및 뇌물 공여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최씨는 “삼성은 저나 대통령과 이야기한 게 아니고 박원오라는 사람이(과 했고) 이미 유연이는 독일에서 자기말을 가지고 가서 연습을 했다”면서 “삼성 말(정유연 훈련용 명마)이나 차(마필 운송차량)는 다 삼성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신동빈 회장 변호인은 “검찰 측 공소사실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법리적으로 의문이 있다”며 변론했다.

문서 형태의 증거 조사가 이뤄질 제2회 공판은 오는 25일 오전 같은 법정에서 열릴 예정이다. 25일엔 해당 증거와 관련된 박씨만 피고인으로 법정에 출석하게 된다. 3, 4회 공판은 오는 29, 30일에 연이어 진행되고 박씨를 포함한 최씨, 신 회장도 법정에 출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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