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다리를 질질 끌고 가서 그녀의 주검을 보았다. 죽어 있는 모습은 정말 참혹했다. 입 주위로는 누르스름한 액체가 흘러 나왔고 그 액체를 둘러싸고 열대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쇠파리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랫도리에는 주먹만한 고무꽈리 같은 것이 밀려 나와 있었다. 그것은 격한 마찰에 의해 애기 집이 뒤집혀 나온 것이었다. 그 시체를 치우면서 왜놈 포주가 말하더구나.

대 일본 제국을 위해 명예롭게 최후를 마쳤다고.”(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일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이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진 것은 소설을 통해서였다. 1981년 여성중앙 공모에서 ‘바람벽의 딸들’로 등단한 윤정모는 이듬해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라는 중편 소설을 한국 사회에 던져놨다. 수많은 조선인 처녀들을 끌어갔다는 소문만 있을 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부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그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다.

문인이자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고 임종국 선생이 81년에 펴 낸 <정신대실록>이 그 계기가 됐다. 윤정모 작가는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1966년) 이후로 그의 작품을 모두 읽어오다가 정신대실록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윤정모는 이 소설에 붙인 ‘연보’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임종국 선생님의 ‘정신대실록’을 읽고 얼마나 살이 떨리던지, 세상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이런 수모를 겪었더란 말인가. 그것도 20만 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바로 다음날로 5살 딸아이를 등에 업고 임종국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 윤정모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윤정모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선생님 말씀이 ‘나는 기록을 증언할 테니 넌 소설을 써라, 모든 캐릭터들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게끔 써라. 실록 같은 인문과학서는 딱딱해서 잘 읽지 않지만 소설은 사람들에게 친화력이 있어서 대중화시킬 수 있다. 경남 지방에서 많이 사냥 당했으니 그것도 감안하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셨고 그래서 마산에서 사냥 당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거지.”

이 작품이 나올 때까지 문단에서 위안부 내지는 정신대가 등장한 건 김정한(1908년-1996년)의 수라도(1969)나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1977)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정신대로 끌려갈 위기에 처했다는 식으로 짧게 언급만 됐을 뿐, 위안부의 실상에 대해 다뤄진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전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모르는 거고, 학병 갔던 사람들도 차마 너무 잔인하니까 얘기하기가 싫었을 거야. 현장을 좀 알리고 싶었거든.”

윤정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서 들었던 피해자를 시작으로, 백방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다녔으나 실패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온 게 이로부터 10년 뒤인 91년이니, 당시 윤정모 작가가 피해자를 만나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책과 자료에 매달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처절한 죽음의 기록이 남아있던 필리핀 루손섬까지 다녀오고서야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1997년 ‘당대’ 출판사를 통해 재발간(82년엔 ‘인문당’)을 하며 쓴 연보에서 윤정모는 “어떤 작품이라도 일단 써 내고 나면 작가의 소관에서 떠나기 마련인데 이 책만은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수하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자꾸만 새롭게 살아나거나 그 계기를 만들 뿐만 아니라 가끔은 나를 지배, 조종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시 20년 가까이가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3~14년 세종문화회관에 오른 연극 <봉선화>(서울시극단, 구태환 연출)는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고 극본도 직접 썼다. 2008년 위안부 할머니들이 손수 그린 그림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봉선화가 필 무렵’도 해외에서 지속적인 반향을 불러오고 있다.

“이게 어떤 운명이 된 거 같애. 피해국 동아시아에서는 번역된 책이 92년까지도 내 것 밖에 없었던 거야. 독일도 다 돌았어. 조그만 마을까지 다 돌았어. 호주에서도 멜버른대학, 시드니, 모나쉬 세 곳의 대학을 돌며 진상을 설명했어, 모나쉬 대학은 짧은 연극까지 만들어 놓은 거야. 연일 강행군하니까 너무 힘들었어. 모나쉬 대학에서는 교정의 의자에 앉아서 울었어. 햇빛이 쨍쨍 내리는데, 그 때 아.. 바람이 싹 지나가는데, 그 바람이 위안부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원혼, 그분들의 한숨으로 느껴지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더군. 벌떡 일어나서 강당으로 갔어. 애들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많이 피곤하면 꼭 그렇게 각성이 돼. 그리고 이게 끊임없이 나를 사목(司牧)한다고 그러나.”

윤정모의 중편 소설은 그 자신 뿐 아니라 80년대의 많은 지식인들을 각성시켰다. 모든 사회과학서적이 금서이던 그 시절에도 그의 책은 출간 당시 5천부 이상이 손에 손을 돌면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윤정모 작가가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빌리 브란트(1913년~1992년 서독 총리)가, 거기도 살아있는 사람의 배를 갈랐다고. 나치 희생자 위령탑에 가서 정말로 몸과 마음을 다 해서 사죄했고, 피해국에서도 받아들였잖아. 진정어린 사과는 받아들였잖아. 아베는 하기 싫어해. 인정 안 하잖아. ‘사과했다고 그래’ 이런 게 싫은 거야. 우리는, 여태까지 그런 대접 받았으니까. 돈이 아니라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뼈를 깎는 반성과 진정어린 사과야.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하는 거야. 나는 아베,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 ‘당신 어머니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당신은 어땠을까요?’ 정말이야, 꼭 그렇게 물어보고 싶어.”

▲ 윤정모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윤정모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연재순서 

②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①-2“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①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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