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한곡을 국민과 함께 부를 자신이 없는 정권, 학살자 편에 선 정권이 물러나고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정부가 들어선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롭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용기도 아닌 것이고, 피해자인 시민 편에 섰다는 점에서 무척 감격스럽다. 예술활동에 무슨 사상논쟁이랄까, 이런 걸로 해서 부르지 말아야 할 노래, 불러야 할 노래를 가르는 비상식적인 시대가 끝나길 바란다. 그동안 버티고 살아온 보람이 있다.”

‘5·18 다큐’로 유명한 전 광주문화방송 피디 오정묵(62)씨. 그는 전두환 독재정권의 눈을 피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장 처음 부른 1세대 민중가수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올해 제37주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것을 지시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울컥했다.

▲ 오정묵 전 광주문화방송 PD
▲ 오정묵 전 광주문화방송 PD
1982년에 태어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애초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 쓰려고 만든 테이프(기획 황석영, 노랫말 원작 백기완, 작곡 김종률)에 들어 있는 노래였다. 엄혹한 그 시절 전남대 3년생이던 그는 소설가 황석영의 운암동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배 윤상원(시민군 대변인)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범벅이 되어 노래 연습을 했다.

80년대 대학가와 노동투쟁의 현장에서 널리 불려지며 ‘베스트셀러’가 된 노래극 테이프 ‘광주여 오월이여’를 후배들을 도와 몰래 편집해 세상에 나오게 한 것도 그다. 노래하는 후배들이 녹음실을 구하지 못해 방송국 피디였던 그를 야밤에 찾아와 “테이프 녹음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는 몇날 밤을 새워가며 테이프를 제작했다.

광주문화방송 피디 시절(1982~2000년) 그는 ‘앞서서 나간 이’들을 달래고 되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라디오 피디 시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출한 ‘정오의 희망곡 오창규입니다’는 5월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시민들에게 ‘타는 목마름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를 들려주며 큰 공감을 샀다.(오창규라는 이름은 황석영이 지어줌). 1985년 5·18 때는 2시간 내내 아무 멘트없이 항쟁 추모곡만 내보냈다. 이게 문제가 돼 방송에서 ‘잘렸다’. “오창규를 복귀시켜라”는 광주시민들의 항의와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광주와 방송계에서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5·18 피디’ 오정묵(프로덕션 (주)오미디어넷 대표)씨를 서울 목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래의 힘, 힘의 노래

- 문재인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곡 지정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제창이냐, 합창이냐 하는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는데 올해 제37주년 5·18 기념식에서는 9년만에 제창을 하게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부군의 학살에 저항한 노래다. 1997년부터 5·18 기념곡으로 제창되던 것을 2009년 이명박 정권이 식순에서 빼버리고 식전 합창으로 바꿨다. 정권이 이 노래를 그만큼 불편해했다는 증거다.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는 합창이든 제창이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창하자 해놓고, 부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 아닌가. 지난 정권들은 “공무원도 함께 부르자”는 말을 차마 못했다고 본다. 그것은 학살정권에 뿌리를 둔 정권이라서 그렇다.

- 여전히 광주시민들은 폭도이며, 심지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 찬양가로 바라보는 세력도 있다.

얼마전 어느 의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서 부르면 ‘임’이 김일성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 가사 중 통일은 적화통일이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다. 세계인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곡을 북한에서 연주하면 ‘종북 곡’이 되나?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영화 배경음악 등에 사용된 것을 트집잡아 제창하면 안된다는 말도 했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 처음엔 유혈 진압당한 광주시민이 ‘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임’의 의미는 노래 스스로의 힘으로 확장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에서 보았듯이 어린 학생들도 따라 부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다시한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와 정신을 짚어본다면.

우리는 1980년의 비극을 되돌아보면서 또다시 자문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을 예견하고도 끝까지 몸을 피하지 않았던 임들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 정신은 촛불광장에서 목터져라 ‘박근혜 탄핵’을 외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시민들의 정신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민주정부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정신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신 아니겠는가.

- ‘임을 위한…’은 노래제목도 나와 있듯이 행진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하다.

행진곡은 4박자이면서 힘차다. 그래서 군가를 들어보면 대개 4박자다. 누구나 부르기 쉽고 편하다. 그러나 같은 행진곡풍의 노래지만 ‘임을 위한…’을 부르거나 들어보면 애수와 비장미, 페이소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노랫말의 힘도 한몫한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노랫말 아닌가.

▲ 1982년에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
▲ 1982년에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

▲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5.18 제37주년 기념 서울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쓴 백기완 선생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5.18 제37주년 기념 서울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쓴 백기완 선생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5·18 피디’가 되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부터 오늘날까지의 운명을 돌이켜보면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노래를 만든 이, 부른 이와 별도로 노래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느낌이 든다. 중국, 일본, 태국, 캄보디아 등 아시아권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번안해 부른다고 한다. 도대체 노래의 어떤 힘이 이 노래를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나게 했을까.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은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5·18 정신이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유산 중 5·18의 가장 상징적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지구촌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으로 모여 뭔가를 염원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역을 초월해 세계인의 양심에 걸맞은 노래이기 때문에, 바로 그 지점에서 노래의 힘이 나온다고 본다. 지역과는 상관없이,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임을 위한…’을 부른다면 그 의미와 영광은 오로지 노래의 몫일 것이다. 노래는 스스로의 힘이 있기 때문에 누가 부르라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부르지 말라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 무등산에서 광주시내를 바라보며 직접 마이크 잡고 리포트하던 ‘TV다큐-임을 위한 행진곡’(1989년)의 끔찍한 화면이 기억난다.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마구 퍼붓고 방패로 찍어대는… 방송이 어떻게 가능했나.

그 프로그램은 내가 직접 글을 쓰고 편집하고 연출했다. 당시 조선대신문 편집위원장 이철규씨 변사사건으로 시위가 일어났는데, 뉴스 화면에는 최루탄 사이로 백골단이 달려가는 모습까지만 나오더라. 그런데 방송사 자료실에서 끔찍한 장면을 발견했다. 백골단이 방패로 시위학생들의 얼굴을 마구 찍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모두 가감없이 편집해 내보냈다. 작업을 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 5·18때 도청에 있었는가.

‘당신 어디 있었느냐’고 묻지 마라. (이 대목에서 그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늘 미안했다. 사망자 명단에서 가까이 지내던 윤상원 선배의 이름을 보게 됐다. 군대 갔다와서 5월14일인가부터 매일 거리에 나갔다. 시위가 격화되고 공수부대가 점령한 5월18일, 그날 너무 무서웠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걸어서 시내 밖으로 나갔다. 사태가 그렇게 급진전돼 외곽이 차단될 줄 몰랐다. “폭도들은 투항하라”는 방송을 5월27일 새벽 외곽에서 들었다. 탱크와 헬리콥터가 발포하는 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날 거기에 없었다’는 미안함과 부채의식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게 했고 ‘임을 위한’ 피디로 열심히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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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다큐 임을 위한…’ 방송 당시는 노태우 정권하였다. 경영진이 끝까지 ‘임을 위한 다큐’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을텐데.

‘내보내느냐 마느냐’는 문제로 사장과 방영 3분전까지 같이 토론했다. 사장은 ‘경영자로서의 고뇌’가 컸을 것이다. 사실 ‘문제가 될 화면’이 많았다. 화가 홍성담의 ‘걸개그림 민족운동 해방사’ 슬라이드 풀버전, 노동조합가 노랫말 자막, 당시 노태우 대통령 전역식 경례와 겹쳐지는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 무력진압 화면 등. 방송이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끝나고 나니 사장은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하더라.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방송을 하게 해줬으니까.

‘안기부 탄압하는 언론노련 해체하라’

- 80년대 후반 광주문화방송 노조 설립 준비부터 2기 노조위원장,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조직국장을 하며 노래패를 만드는 등 언론운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특히 어떤 활동들이 기억에 남나.

광주언노협 의장을 하면서 부경언노협과 지역을 뛰어넘는 활동을 했다. 나는 원래 기질이 딴따라다. 그래서 문화연대를 많이 했다. 노래패, 풍물패를 만들어 신나게 활동했다. 30대를 온통 광장에서 보낸 거 같다. ‘노래패친구’라고 하는 문화운동단체의 사회도 봐주고 노래찬조도 했다. 돌아보니.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영혼이 있는 삶을 살았다. (이 대목에서 그는 느닷없이 하하하 웃었다. 그가 웃은 이유는 이래와 같다.) 언노련 문화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90년대 초반 성균관대에서 언노련 조합원 총회를 했는데 당시 손석희 아나운서가 1부 사회를, 2부 사회를 내가 봤다. 그때 내가 ‘안기부 탄압하는 언론노련 해체하라’고 외쳤다. 청중의 호응이 엄청났었다, 하하하.

- 지금도 문화활동을 하며 노래도 하는가.

프로덕션(오미디어넷) 일을 하면서 ‘달빛통맹’을 이끌고 있다. ‘달빛통맹’은 ‘빛고을(광주)과 달구벌(대구) 통기타 연맹’을 말한다. 이렇게 지역의 통기타 뮤지션을 조직화해 해마다 두 도시를 오가며 기획자로서 사회도 보고 노래도 부른다. 지역을 넘나들며 서로 우애를 나눈다는 점도 흐뭇하다. 다행히 두 시에서 적극 후원해줘 6월엔 대구, 9월엔 광주에서 공연한다. 지방에서 축제를 하면 얼굴 알려진 가수들이 출연료를 다 챙겨가는데, 통기타 가수들이 설 무대가 생겼다.

- 지금 문화방송의 기자와 피디 등 후배들이 투쟁중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KBS, MBC, YTN 등의 후배들이 공정보도를 요구하고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하다 거리로 내몰리기도 했다.

가슴아픈 일이다. 후배들의 힘겨운 투쟁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지지하고 있다. 언론 정상화가 시급하다. 언론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절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언론계도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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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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