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외 직접 증거 확보가 어려운 뇌물죄 입증을 둘러싸고 박영수 특검팀이 증인들의 위증 시도와 싸우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이미 한 차례 '진술 맞추기'를 한 정황이 확인된 상황에서 특검팀은 일부 증인의 진술 번복에 '진실 은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특검팀은 지난 1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14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이영국 제일기획 상무와 끈질긴 입씨름을 벌였다. 이 상무는 삼성그룹의 213억 원 규모 '정유라 승마지원' 뇌물과 16억 2800만 원 규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뇌물 혐의 모두에 관여한 삼성 측 관계자다. 그는 2014년 11월 대한승마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해 2015년 중순 경 다시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옮겨갔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3개월 째인 5월17일 오전 서초구 서울지방법원에서 뇌물공여 등 14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3개월 째인 5월17일 오전 서초구 서울지방법원에서 뇌물공여 등 14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이 상무는 1기 검찰 특별수사본부와 특검에서 각기 다른 진술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상무는 승마협회 부회장이었던 자신이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교체된 시점을 2015년 7월26일로 기억함에도 검찰에 '7월22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삼성전자의 10억7800만원 영재센터 2차 후원금 지급이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사실을 은폐했다.

이 상무는 진술 번복에 대해 특검에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간 7월25일 독대 사실을 진술하지 못하던 시점이어서 이에 맞추느라 법무팀에서 교체 시점을 7월25일 이전으로 진술하라고 조언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한 번복 경위에 대해 특검에서 “검찰 조사 날인 11월20일 전날이나 당일, 삼성전자 사옥 사무실에서 삼성전자 소속으로 추정되는 법무팀 직원의 조언을 들었는데 그 분들이 나에게 승마협회 부회장에서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교체된 시점을 7월22일이라고 진술하라 조언해, 직전에 교체된 것처럼 말했다”면서 “장충기 사장의 지시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도 진술하지 말아달라 조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상무는 법정에서 이 진술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며 "이거를 (조사 후) 봤으면 수정했었어야 하는데 수정을 못해서 후회가 된다"고 수차례 말했다.

그는 또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독대를 숨기려 했다’는 취지의 진술에 대해 "그 부분을 제 입으로 다 했다기보다는 검사가 도와준 것으로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진술조서를 작성한 박주성 검사는 "증인이 진술했다. 증인이 진술 안하면 제가 이 내용을 어떻게 아느냐"고 반발했다. 거듭된 실랑이 끝에 박 검사는 "입회했던 변호인이 지금 방청석에 있다"며 "증인, 이거 제가 먼저 말한 게 맞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이 상무는 재판부의 "검사가 저렇게 말해서 증인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는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특검팀은 이를 '삼성 측 법무팀의 조직적 말 맞추기' 정황으로 보고 있다. 김 검사는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 조사 과정을 보면 답변이 상식에 반할만큼 일치하고 나중에 보면 허위 답변도 일치한다"며 "증인 뿐 아니라 수사기관에 출석하기 전 법무팀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답변할 지 내용까지 조언받은 것 같다. 조사 때 답변 내용 조언 받은 게 맞느냐"고 물었다.

특검 측 증인과 상반된 주장… 특검 "삼성 관계자들, 상식에 반할 정도로 진술 일치"

삼성 측의 최순실씨 및 정유라씨 파악 시점은 '뇌물공여 대상'에 대한 인지 여부와 관련돼 있기에 삼성 뇌물 재판에서 주요 쟁점이다. 특검은 삼성 관계자들이 지난 2014년 9월부터 최씨의 영향력 및 정씨의 존재를 인지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삼성 측은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8월, 나머지 피고인인 삼성그룹 임원 4명은 2015년 7월에야 알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검이 제시하는 증거 중 하나는 이 상무가 2014년 12월17일 ‘2014 승마인의 밤’ 행사 당시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다. 이 상무는 "정윤회씨 딸 수상 참석을 취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으나 정유연(개명 전 이름) 사전 불참으로 조치됐다"는 내용의 문자를 장 전 차장에게 보냈다.

이 상무는 이에 대해 "'조치됐다'고 표현한 것은 당시 회장사인 한화 측이 조치한 것이어서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라 해명했다. 삼성 측이 정유라씨의 존재를 알고 선제 조치를 주도한 게 아니라는 취지다.

"한화 측 조치면 문구를 '한화가 조치를 했다고 합니다'가 돼야 하지 않느냐"는 김 검사의 질문에 그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표현해도 의미는 전달될 것이라 여겼다"고 답했다.

이 상무는 다른 참고인들의 진술과 위배되는 증언을 다수 내놨다. 그는 이날 법정에서 2015년 5월8일 정씨의 출산 사실을 두고 "작년 9~10월 경 언론을 통해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종찬 승마협회 전무이사에 따르면 이 상무는 '2015년 5월 경'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특검 조사에서 "박상진 사장이 승마협회 회장 취임 후인 2015년 5월 쯤, 이영국 상무가 저에게 '정유연이 애를 낳았다는데 아느냐'고 물어봤다. 정유라가 대한승마협회에 훈련계획서 제출하며 2015년 상반기에 독일에서 훈련한다 했기에 당연히 정유라가 독일에서 훈련하는 걸로 알았고 이영국에게 아니라고 했더니 이영국이 '그걸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2015년 5월 경 김종찬 전무에게 정유라 출산에 대해 물어본 적 있느냐"는 검사측 질문에 이 상무는 "물어본 적 없다. 기억에 없다"고 답했다.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와 대립되는 진술도 있다. 삼성 측이 최씨 소유 회사 '코어스포츠'를 칭하는 '컨설팅 회사'를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냐는 문제다. 코어스포츠는 정씨 1인 승마훈련 지원을 했던 최씨 소유 회사로, 삼성은 '삼성 승마단 독일 전지훈련 지원' 명목으로 2015년 8월 이 회사와 213억원 규모의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박 전 전무는 특검 조사에서 2015년 7월26일 이영국 상무가 전화해 "'내가 박상진 사장을 모시고 독일을 직접 가겠다. 정유라 말 훈련 하는거 볼 수 있냐, 컨설팅 회사 측과 미팅 가능하냐' 물어봤다"고 진술했다. 이어 박 전 전무는 "당시 예거호프 승마장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어수선했고 정유라가 말을 안 탄 지가 너무 오래돼 삼성 측에 보여 줄 상황이 아니었다. 최순실이 컨설팅 회사를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 운영할 지 전혀 논의가 안 돼 있어서, 갑자기 삼성이 컨설팅 회사 미팅을 얘기해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영국 상무에게 '갑작스럽다. 여기서 프랑크푸르트가 1시간 거리이니 약속시간을 말해주면 프랑크푸르트로 가겠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 상무는 이에 대해 "컨설팅 회사에 대해선 정확히 모르고 (당시 대화가) 기억이 안난다"고 답했다.

이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의 입장과 비슷하다. 박 사장은 자신이 박 전 전무를 만나기 전부터 '컨설팅 회사'를 언급한 것에 대해 7월25일 김종찬 전무로부터 들었다고 해명했다. 김 전무는 특검에서 "그 당시 컨설팅 회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라고 반박했다.

"증인, 선서하셨습니다… 위증 처벌 각오하고 말씀하시는거냐"

박 전 전무가 작성한 '대한승마협회 중장기 로드맵'을 삼성 측이 먼저 요구했는지 여부도 쟁점이다. 해당 문건은 정씨 1인 승마 지원안의 청사진이 된 계획안이다. 삼성이 대통령의 질책에 어쩔 수 없이 정유라를 지원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황 중 하나다.

이 상무는 법정에서 "증인이 박원오에게 올림픽 플랜을 짜달라 요청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전무는 이영국 상무가 2015년 6월 초 2020년 도쿄올림픽 지원 계획안을 요구해, 6월10일 해당 문건을 작성해 삼성 측에 전달했다고 특검에 진술했다.

특검팀 김영철 검사는 이 과정에서 수차례 "증인, 선서하셨습니다" "위증 처벌 각오하고 말씀하시냐"고 말했다.

김 검사의 거듭된 위증죄 환기에 삼성 측 변호인은 '검찰 측이 위협적 신문을 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이에 재판부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의 진술이 달라지면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그 과정에서 증인의 답변 내용이 이해가 안가면 주의 환기 차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 특검 측도 그 정도로 언급하시라"고 정리했다.

한편 이 상무는 검찰 조사 당시 '진술인은 2014년 12월 경 정유라씨 관련 의혹 핵심에 박원오씨가 있다는 기사가 보도돼 논란이 된 사실을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 "2014년 12월 경 정윤회가 정권 실세인데 박원오가 정유라의 아버지인 정윤회 쪽으로 선을 댔다는 소문이 돌았고, 저도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답한 적이 있다. 12월3일 한국일보가 보도한 '정윤회 딸 국가대표 선발 미스터리' 기사에 대한 진술이다.

이 상무는 이 진술에 대해서도 불명확한 답을 내놨다. 그는 "단정적으로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거 같고 소문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국회의원이 공주승마 의혹 제기한 기사가 났는데, 그게 섞여서 (소문이) 난 것 같다" 등이라 말하며 확답을 피했다. 결국 재판장의 '이렇게 진술한 게 맞느냐'는 질문에 그는 "맞다"고 답했다.

김 검사는 "제가 드리는 질문이 어렵지 않은 것 같거든요"라면서 "부회장 취임 이후인 12월 '공주승마'라 해서 정유라에 대한 특혜 의혹 있었고 언론에 다뤄졌고 그 뒤 박원오란 사람이 중심에 있다고 기사났다. 그 때 박원오가 정유라 뒤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냐 이 질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영국 상무에 대한 증인신문은 17일 오후 2시30분 경 시작해 밤 11시40분까지 약 9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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