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광주민중항쟁 37주년.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대통령이 국민의 촛불과 탄핵 심판으로 물러나고 대선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 지금, 5월에 맞는 광주민중항쟁 기념일은 더 각별한 느낌이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이 유혈의 처절한 민주화투쟁이었다면 박근혜를 몰아낸 최근의 촛불시위는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 승화된 발전 동력으로 융합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극우보수 권력이 거부했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이번 5·18기념식에서 제창할 수 있게 된 것은 또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광주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하지만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나는 ‘광주민중항쟁’이란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민주화운동’이란 말이 더 교과서적 정서에 어울리는 말일지 라도 나한텐 ‘항쟁’이란 말이 더 역사적 정서에 맞는 것으로 인식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야권은 광주민중항쟁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했으나 후에 민정당 노태우 체제의 주장을 받아들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게 됐다. 1980년 5월의 그 엄청난 현장을 본 사람들로서는 ‘항쟁’이라는 말이 백번 옳게 들린다.

1980년 5월, 광주 현장을 취재할 때 30대였던 나는 세월이 흘러 이젠 70대 노객이 되어 기억력도 많이 흐려졌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현장에서 발로 뛰며 겪었던 그 절박하고 험악했던 체험은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현장이 생생한 환영(幻影)이 되어 머릿속 가득 떠오른다. 처절했던 항쟁의 무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날의 피어린 아우성이 메아리쳐 들려온다.

▲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입구에 북한특수군 개입설을 바로잡고 신고를 받는다는 게시물이 전시돼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입구에 북한특수군 개입설을 바로잡고 신고를 받는다는 게시물이 전시돼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계엄군과 시위 군중과의 숨막히는 가두 공방, 총성과 피로 물든 금남로-전남도청 광장,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 통곡과 비명으로 가득한 병원 사체실, 마지막 도청안의 처절한 장면, 금남로, 농성동에서 총알이 머리 곁을 스쳐갔던 위기의 순간 등 불지옥 같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다시 파고 들어오면 금방 숨이 가빠진다.

한국일보 사회부에 있었던 1980년 5월19일 오후, 밖에서 노동 현장을 취재 중인데 사회부장(김해도·전 언론중재위원회 사무총장)이 급히 날 호출해 들어갔더니 “빨리 광주에 가라”는 급명을 내렸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집에 가 옷 하나 못 챙긴 채 견습 훈련 중인 후배 한 명을 데리고 급히 광주로 갔다. 날이 저물어 도착했는데 눈앞에 광주KBS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진실 보도를 숨기는 언론은 이미 ‘적’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이틀째 날이었다. 광주에서는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한 후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전개된 데 이어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학교 봉쇄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을 계엄군이 곤봉 등으로 무차별 난타하는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어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해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 시민들도 가세해 시내 곳곳으로 항의 시위가 번지자 계엄군이 건물, 버스, 민간인 집 등 사방을 뒤지며 대학생, 젊은이들을 잡아내 곤봉, 개머리판, 군화발로 무자비하게 난타하고 심지어 대검으로 난자까지 하는 대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곳곳에서 항의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난타했고 계엄군의 이 같은 만행은 다음날인 19일에도 계속됐다. 내가 갔을 때 시내 병원들은 피범벅이 된 중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는 그렇게 5월19일부터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에 진입한 5월27일 다음날까지 10일간을 광주에 있었다. 당시 광주에서는 항쟁의 시발이 된 5월18일을 ‘피의 일요일’, 금남로의 대유혈 공방이 벌어지고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5월21일을 ‘피의 초파일’, 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내가 현장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본 것은 광주항쟁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5월21일이었다. 시민군-계엄군 간에 최대의 공방, 최대의 혈전이 벌어진 이날은 부처님 오신 초파일로, 금남로 피어린 현장에 총탄에 스친 봉축아치가 걸려 있어 기막히게 슬픈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한 현장의 생생한 내용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신문들이 모두 전두환 군부의 강요로 진실을 덮은 허위 관제보도 내용만 싣고 현장에서 보낸 내용은 묻어버렸다. 시위대가 도청에 진입한 날 저녁, 취재 중 금남로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나를 붙들고 “기자들도 적”이라며 눈을 부릅떴다. 광주에서 언론은 공공의 적이 되고 신문지사와 방송국들이 곳곳에서 돌, 화염병 등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서울서 급파된 기자들은 본사에 “제발 신문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신문사 복귀 후 데스크에 요구한 끝에 그간의 실제 상황을 내용을 좀 순화시켜 압축 정리한 원고를 냈으나 그마저 시청에서 계엄군부의 검열 칼날에 산산조각이 난 채 사장돼버렸다. 난 광주에 갔다 온 후 비통한 마음으로 장시간 깊은 침묵의 병을 앓아야만 했다.

▲ 1980년 계엄군에 장악당한 신문과 방송 등이 공수부태 투입에 저항한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이자 분노한 시민들이 5월20일 광주시에 위치한 MBC와 KBS 방송국을 불태웠다. 사진은 당시 불에 탄 MBC 방송국 건물. 사진=5·18기념재단
▲ 1980년 계엄군에 장악당한 신문과 방송 등이 공수부태 투입에 저항한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이자 분노한 시민들이 5월20일 광주시에 위치한 MBC와 KBS 방송국을 불태웠다. 사진은 당시 불에 탄 MBC 방송국 건물. 사진=5·18기념재단
내가 있던 한국일보에는 끝내 광주 현장에서 취재한 생생한 실제상황이 보도되지 않았다. 부장이 되어 뒤늦게 한국일보 데스크칼럼 ‘메아리’에 마지막 날 장면의 한 토막을 겨우 썼을 뿐이다. 한참 세월이 흘러 광주항쟁 17주년 되는 해인 1997년 5월 출판사 ‘풀빛’에서 광주항쟁 당시 내외신 기자들의 취재기를 추려 엮은 책 ‘5·18 특파원 리포트’를 출간해 거기에 좀 상세한 취재기록을 소개할 수가 있었다. 관련해 그때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얼마간의 소회를 풀어놓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다음은 ‘5·18 특파원 리포트’ 중 광주항쟁 4일째이자 그 최절정에 이르렀던 5월21일 상황의 일 부를 간추린 내용이다.

광주항쟁 4일째의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하늘에선 군 헬기의 공중정찰 소리가 요란하고 공수부대 병력이 도청 쪽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새벽 6시께, 시민들이 도청 쪽으로 몰려오고 그 앞쪽에 트럭이 사체 2구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시민, 학생들은 밤새도록 금남로, 광주역, 충장로, 제봉로, 계림동 등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는데 간밤에 10여명이 희생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체를 본 시민들은 분노해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 군중들은 계속 불어나고 시위대들이 징발한 버스, 트럭, 승용차 등 각종 차량들이 도청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오전 8시쯤엔 청년들이 다수의 군용트럭에 수대의 장갑차, 가스차까지 몰고 나타났다. 공단에 있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징발해온 것이라고 했다.

오전 10시 전 이미 10만을 넘는 거대한 군중의 물결이 금남로와 그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도청 앞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운 채 방어선을 더욱 조이고 시가엔 공포의 그림자가 휩싸이면서 유혈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더 가까이 오자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퍼부으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낮 12시50분께 돌연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다. 웃옷을 벗고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광주만세”를 외쳤다. 순간 도청 공수부대 쪽에서 총성이 터지면서 청년이 피를 뿜으며 쓰려졌다. 이어 시위대의 트럭과 버스 등 차량들이 뒤따라 질주했고 군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 지 10분쯤 지났을까 도청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요란한 총성이 하늘을 찢으면서 시민들이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건물 위에서도 총탄이 쏟아졌다. 군중이 들고 있던 태극기도, 아스팔트도 피에 물들었다. 당시 난 금남로 2가 상업은행 부근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한 시민이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날 오후 기독병원 등 시내 병원은 사상자들로 초비상상태였다.

상황은 점점 위급해지고 있었다. 난 데리고 간 후배 견습기자를 찾아 며칠간의 상황을 정리한 취재노트를 보물처럼 안겨주고는 “빨리 빠져나가 서울로 가라”며 광주에서 탈출시켰다. 이미 21일 새벽부터는 통신이 끊겨 기사 송고나 연락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날 밤 광주역이 마비된데 이어 이날 오전 중엔 고속버스 길도 끊겨 광주는 고립상태로 치달았다. 관청, 상가, 학교가 모두 문을 닫고 파출소 경찰들도 잠적해버렸다. 도청 안에 있던 기자들에게도 오후 2시전에 피신하라는 급보가 내려졌다.

오후 2시 넘어 시위대가 모는 경찰화학차가 소총, 탄약, 다이너마이트 등 무기를 싣고 금남로 3가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총기를 나눠주었다. 기관단총 등 무기차량이 잇달아 진입했다. 한쪽에서는 휘발유를 넣어 만든 화염병을 수없이 만들어 나눠주고 있었다. (무기들은 시위대들이 화순, 나주, 장성 등 광주 인근지역 경찰서 예비군무기고와 탄광 등지에서 빼내온 것으로 밝혀졌다)

오후 2시40분께 금남로 시위대들이 대형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 저지선으로 굴리고 트럭을 후진시켜 몰아넣었다. 공수부대가 발포를 하고 쌍방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총소리와 비명,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금남로는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졌다.

오후 4시40분께 시위대가 트럭에 불을 붙여 밀어넣자 뒤로 밀려나던 공수부대원들이 서둘러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혈참극을 벌였던 공수부대들이 서둘러 완전히 퇴각하고 시위대들이 도청에 진입했다. 오후 5시반이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만세를 외치는 군중. 전두환 군부 타도를 외치는 항쟁 시민들. 만행을 저지른 공수부대, 쿠데타 군부의 ‘개떼들’을 물리쳤다는 승리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시켰다.

21일은 초파일. 거룩한 석가모니 탄신일인 이날 광주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어 피바람의 난리를 치르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거리의 사망자만 70명선에 이르고 부상자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고 엿새 뒤 공수부대의 새벽 기습작전으로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또 많이 희생되면서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사진. 사진=5·18기념재단
▲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사진. 사진=5·18기념재단
당시 광주에서 돌아온 뒤 난 신문에 현장의 참상과 진실을 보도하지 못한 자책감에 빠져 좌절했고 심한 우울증세를 겪으며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경고성 충고가 잇따랐다. “눈에 핏발이 섰다. 살기가 돈다”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나하고 대화를 피하려는 눈총을 수없이 견뎌야만 했다. 광주항쟁을 보고 온 체험은 ‘원죄’가 되어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그해 1980년 연말 언론계에 강제해직 바람이 불면서 곳곳에서 기자, 피디들이 회사에서 추방됐다. 어느 날 편집국장(후에 민정당 국회의원)이 나를 찻집으로 불러내더니 “회사를 나가야할 지 모르겠다. 각오를 하고 있으라”고 통보했다. 사유가 뭐냐는 내 물음에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통보 받은 사람이 날 포함해 5∼6명 됐는데 다행인지 경영진이 직접 나서 뒤늦게 해직 명단에서 뺄 수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다음해 봄에는 외부 출입처 취재 금지를 당했다. 보안사에서 “작년에 해직된 줄 알았는데 왜 아직 남아있냐”는 추궁이 편집국장 앞으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긴 기간 ‘연금 상태’ 내근을 했다.

언론사에서는 광주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해직 등 수난을 겪은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경향신문의 경우 모임에서 광주의 진상을 말했다는 이유로 수명이 감옥에 가 수난을 겪기도 했다.

광주 마지막 날의 한순간을 더 보태본다. 다음 글은 광주항쟁 이후 15년 후인 지난 1995년 5월 전국부 부장 시절 한국일보 칼럼 ‘메아리’에 썼던 내용의 일부다.

오월 이맘때가 되면 광주에 가 있었던 10일간의 체험이 슬픈 추억의 단편으로 잠재해 있다가 함성으로 되살아난다 …중략…

불현듯 당시의 일지가 생각나 빛바랜 취재수첩을 꺼내본다. 그때의 기록은 한 학생의 죽음의 현장에서 끝나 있었다.

80년 5월 27일 아침, 전남도청안 도경종합상황실 뒤편. 꽃이 모두 떨어진 화단 옆에 한 청년이 복부에서 피를 흘린 채 하늘을 보며 숨져 있었다. 군복상의에 갈색바지, 뒷주머니엔 조그만 수첩이 하나 꽃혀 있었다. 발밑엔 흰 운동화와 탄피가 흩어져 있고 머리 앞쪽에는 철모와 총알이 뚫고 간 둥근 쟁반이 뒹굴고 있었다. 서울 동국대 전자계산원 1년 박병규(1960년생)군으로 확인된 이 학생은 총성을 듣고 건물에서 뛰쳐나오다 계엄군의 총탄을 얇다란 과일쟁반으로 막으려했던 것 같다.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곳에 이르게 했는가. 그의 죽음은 유난히 슬픈 환영이 되어 오랜 세월 뇌리에 파고 들었다. 광주항쟁 당시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불렸던 이 젊은이는 죽어서 이제는 ‘열사’가 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옛날의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리고 신군부세력이 지칭했던 ‘폭동’은 ‘시민항쟁’으로, ‘폭도’는 ‘시민군’으로 바뀌었다. 죽어 묻힌 자는 민주의 성지 망월동묘역의 열사가 됐다.

그러나 겨울공화국이 지나간 지금에도 광주에서는 여전히 한(恨)의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5.18 기념행사나 관련 모임 등에서는 진상규명, 관련자처벌의 주장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다. 세상에는 꼭 풀어야할 한이 있다. 광주의 한이 바로 그런 것이다 …중략…

윗글을 쓰고 다시 22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광주는 아직도 풀어야할 한이, 보듬어야할 상처가, 규명해야 할 진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최근 전두환의 해괴한 자서전이 국민을 분노시키고 있다. 전두환은 책에서 발포명령을 부인하면서 군에 의한 의도적 양민학살은 없었다는 망발을 늘어놓았다. 광주 희생자가 확인된 사망자만 200명선에 이르고 5·18민주화운동의 보상자로 인정받은 실종자, 부상자까지 하면 5000명을 훨씬 넘어서는데도 말이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도 계엄군의 양민학살을 부인했다. 국민심판, 재판을 다시 해야 할 판이다.

▲ KBS 뉴스 ‘“정지비행 상태서 발사”… 5·18 헬기사격 공식 확인’ 보도 일부분
▲ KBS 뉴스 ‘“정지비행 상태서 발사”… 5·18 헬기사격 공식 확인’ 보도 일부분
5·18 당시 헬기사격의 증거가 최근 드러났다. 옛 전남도청 인근 전일빙딩에서 공사중에 헬기난사로 보이는 수많은 탄흔이 발견된 것이다. 국회에서 거론된 헬기사격진상규명특별법이 하루 빨리 제정되어야 하는 명확한 증거다.

5·18은 발포 책임자를 명시적으로 지적해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해야하는 등 분명히 규명해야할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다.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은 마저 찾아내 매듭을 지어야한다. 그것은 광주의 남은 한을 푸는 것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대한 과업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정교과서 폐지를 선언하고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도록 결정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꽉 막혔던 속이 확 터지는 것 같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 망월동 열사들도 그 뜨거운 함성을 듣겠지.

5·18 37주년에 5·18항쟁을 기리는 노래가 국민의 제창으로 힘차게 울려 퍼지는 희망의 5월. 제대로 기를 펴게 된 이 노래가 광주민중항쟁의 숭고한 뜻을 높이고 바른 역사를 되찾는 희망의 신호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이 글은 자유언론실천재단과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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