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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는다.”
“잊지는 말되 과감하게 용서함으로써 새롭게 화해하자고 말하고 싶다.”

1993년 5월13일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관련 담화에서 진상규명·책임자처벌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말했다. 5·6공 세력과 YS계가 뒤섞인 문민정부의 한계였다. 김영삼은 담화에서 자신이 5·18에 항의한 대가로 3년간 가택연금을 당했을 때 23일간 단식투쟁한 사실을 언급하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정부”라고 말했다.

이는 한국사회가 5·18을 다루는 기본 틀이 됐다. 갈등과 화해의 이분법이 작동했다. 대통령의 숙고 끝에 나온 시혜를 받아들여 “신한국 창조의 넓고 큰 길”로 나서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담화발표 당일 KBS 9시뉴스는 광주고속터미널에서 “광주의 억울한 누명이 쉽게 벗겨지는 걸 환영한다”는 ‘일반시민’ 인터뷰를 내보냈다.

5월16일 MBC ‘일요보도국’에서 앵커는 “역사속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금은 갈등과 마찰보다는 지혜와 슬기를 모아야 할 때”라고 했다. 5월17일 김수환 추기경은 KBS 9시뉴스 인터뷰에서 진상규명을 하면 책임자를 처벌하게 되고 이럴 경우 군이 동요하게 돼 불안이 조성된다는 주장을 했다. 대통령이 진심을 다한 만큼 아량으로 용서해달라는 메시지도 남겼다. 김영삼-민자당-김수환 뒤엔 은폐된 전두환·노태우의 목소리가 있었다.

▲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공희 광주대교구 대주교는 김수환과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며 “김영삼이 5·18 진상규명을 역사에 떠넘겨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데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5·18 관련단체 간부 정동년은 “진상규명의 요구를 한풀이, 보복차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몹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 ‘갈등을 부추기는 목소리’는 외면 받았다.

5·18의 구도는 ‘군부독재vs민주화를 바라는 시민’에서 ‘화해를 바라는 다수의 선량한 시민vs갈등을 일으키는 5·18관련단체’로 변했다. 5·18 단체들이 제시한 5대원칙 중 우선과제인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은 뒷전으로 밀렸다. 다음 3개 원칙이자 김영삼이 담화에서 밝힌 명예회복, 기념사업추진, 피해보상 등 화해의 축이 가시화됐다.

용서와 화해 끝엔 전두환 사면이 있다.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정부는 국민대화합 차원이라며 전두환·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민간인학살 주도 등 9가지 혐의로 전두환이 대법원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지 8개월만이었다. 학살책임이 있는 독재자의 사면은 ‘독재vs반독재’의 전선이 무너진 결과이자 김영삼 정부가 민주주의 관점을 외면한 결과다. 5·18이 ‘학살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한국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도 전에 독재자에게 면죄부가 갔다.

5·18, 광주만의 비극으로 축소

책임자 사면은 사건규정을 모호하게 했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경 애국가 후렴을 부르던 광주시민을 향해 계엄군이 첫 방아쇠를 당겼다.

이는 불법으로 권력을 점한 군부가 ‘민주화’를 향해 쏜 것인가?(5·18 관련단체 중심의 입장) 과하게 저항했던 광주란 ‘특정지역’을 권력이 잔혹하게 진압한 것인가?(다수 국민의 인식) 북괴와 폭도가 광주에 나타나 계엄군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인가?(전두환 세력의 주장) 나치를 옹호하면 처벌을 받는 독일과 비교하면 5·18은 아직 논쟁중인 셈이다.

김영삼 정부를 거치며 전두환 목소리에 정당성이 실렸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1980년 7월22일 “광주사태는 자그마한 사건으로 마이애미의 폭동 정도로 본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든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했다. 모두 광주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 아래 여러 행사가 다채롭고 평화롭게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강조됐다. 5·18 관련 행사들은 ‘광주’에서 벌어지는 연례행사가 됐다. 행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단신으로 처리됐다. 자칫 행사가 무질서해질 경우 5·18정신까지 훼손될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화해가 갈등을 덮었다. 5·18의 진실을 찾자는 요구는 국민적 합의로 승화하는데 실패했다. 5·18은 광주 안에 박제됐다. 광주 밖에선 5·18이 여전히 왜곡되고 있다.

왜곡되는 5·18, 진원지는?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광주에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라거나 “지만원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북한이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등을 얘기했다.

이는 이미 허위사실로 드러났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조사에 따르면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는 ‘학생시위 대처방안’을 마련해 1980년 5월7일부터 군 투입을 준비했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상정하고 있었다.

지난해 전두환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5·18 북한군 침투에 대해 보고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했고, ‘북 특수군 600명 광주침투’에 대해 “600명이 뭔데? 난 오늘 처음 듣는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최근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지만원의 주장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왜곡주장에 올라탔다.

현재 유포되는 유언비어는 1980년 당시 신군부와 그들이 통제한 언론이 뿌린 주장을 기초로 한다. 북괴의 개입을 주장하거나, 당시 실세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개입과 계엄군의 만행을 은폐하는 주장은 5·18 당시부터 있었다. 시민군을 폭도로 매도하며 나머지 시민과 분리하는 당시 프레임은 김영삼 정부가 제시했던 ‘갈등vs화해’ 프레임의 기초가 됐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는 당시 유언비어는 극우세력의 호남혐오로 최근까지 이어진다.

▲ 1980년 5월25일 광주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 1980년 5월25일 광주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호소문을 통해 “북괴의 격증하는 적화책동이 학원소요를 고무 선동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조성하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다”며 “이와 같은 사태가 경제난까지 극도로 악화시켜 바야흐로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19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는 발표문에서 “북괴고정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책동,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학생소요사태를 배후 조종해 온 김대중이 광주의 전남대와 조선대 내 추종 학생들을 조종·선동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 됐다”고 했다. 북괴-김대중-광주를 묶어 불순분자로 매도하는 주장이다.

광주상황을 전하는 언론은 학살의 배경은 생략한 채 혼란만 드러냈다. 5월25일자 당시 김대중 조선일보 사회부장의 기사 “무정부 상태 광주 1주”의 중간제목은 “총 들고 서성대는 ‘과격파들’, 길목서 저지…총기반납 지연”과 “시민들 생필품 동나 고통스럽다”였다. 군부의 학살은 생략된 채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과 고통 받는 선량한 다수 시민의 대비가 강조됐다.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에서 크게 성장해 1등 신문이 됐다.

조선일보는 신군부의 집권을 환영하는 입장도 소개했다. 5월17일자 3면 한국신학대학장 조향록은 칼럼 “요즘이 걱정스럽다”에서 “민주정치에 있어 군대가 정치적 중립에 있어야 함은 철칙이요 상식이지만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군인이 아닌 승려인들 어찌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인가”라고 썼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됐다. 5월20일 전남매일 기자들이 18~19일에 있던 특전사들의 잔학상을 썼는데 인쇄 직전 한 간부가 판을 엎었다. 전남매일 모든 기자는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써서 뿌렸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우리는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 기자 일동”

▲ 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 된 6월 2일자 1면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지면)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김준태 시인의 109행짜리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33행으로 잘렸다. 현재 대장은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돼있다.
▲ 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 된 6월 2일자 1면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지면)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김준태 시인의 109행짜리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33행으로 잘렸다. 현재 대장은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돼있다.

▲ 계엄사 검열 이후 전남매일신문 1면
▲ 계엄사 검열 이후 전남매일신문 1면
5월20일부터 경향신문, 중앙일보, 동양방송, 한국일보, 21일부터 동양통신 등의 언론인들이 검열과 제작을 거부했다. 하지만 일선 언론인이 빠진 자리에 간부 등 소수가 진입해 변칙적으로 뉴스를 제작했고, 왜곡과 은폐가 더 심하게 나타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윤덕한 전 경향신문 기자의 ‘한국 언론 바로보기 100년’에 따르면 5월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확대조치의 배경과 불가피함을 설명한 뒤 협조를 요청했고,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같은 당부를 한 뒤 1인당 100만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주요일간지 부장급 월급은 45만원 내외였다.

신군부의 이중 플레이는 당시 광주시민들이 작성한 자료에 나타난다. 5월24일 ‘5·18사태 수습대책 위원회 일동’의 ‘계엄분소 방문협의 결과보고’에는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는 시민들 요구에 계엄사는 현장 설명을 듣고 과잉진압임을 시인했고, ‘폭도와 같이 자극적인 어휘사용을 금지하라’는 요구에 “순수한 시민을 폭도라 함이 아니요, 악용하는 자를 말하는데 상부에 부드러운 어휘를 사용토록 진정했다”고 했다.

3일 뒤인 5월27일 신군부는 157명의 시민군이 지키던 전남도청을 진압했다. 조선일보는 28일 “악몽을 씻고 일어서자”란 사설에서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라며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28일 신군부가 뿌린 것으로 추정되는 전단지에는 “광주 질서·안정 되찾아”, “최규하 대통령 지시, 계엄군 시민 피해 없이 새벽에 진주, 구호·복구에 최대역량 동원”, “서로 믿고 화합, 하루빨리 복구” 등의 내용이 있었다. 조선일보 등 다수 언론이 27일 “무장 저항하던 폭도 17명을 사살하고 295명을 체포했으며 도청과 경찰국 등 주요 청사와 시가지를 완전히 회복시켰다”고 전한 것과 같은 논조다.

80년 5월의 실상은?

학살 당시 국내 언론은 신군부의 대변인으로 전락했다. 성난 시위대가 왜곡보도에 항의하는 뜻으로 광주MBC·KBS에 불을 지르기도 했지만 21일 이후 광주시민들은 고립된 가운데서도 질서를 유지했다. 서로 약탈하거나 금융기관을 습격하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등을 중심으로 한 들불야학 팀이 만든 ‘투사회보’(9회 이후 ‘민주시민회보’)는 광주지역 유일한 언론이었다. 계엄군의 발포를 은폐했던 언론과 달리 21일자 투사회보 1호에는 “놈들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면서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등 당시 상황과 행동준칙을 알렸다.

▲ 1980년 5월23일자 투사회보.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돼있다.
▲ 1980년 5월23일자 투사회보.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돼있다.

투사회보 6회는 “현재 병원에서 확인된 시체가 102명, 변두리에 버려진 시체, 군인들이 실어 간 시체가 550명, 합계 6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중상자 500여명, 경상자를 포함, 총 2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며 피해상황도 기록했다.

또한 투사회보는 “계엄령을 철폐할 것,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할 것, 구속 중인 학생과 시민, 민주인사들을 즉시 석방하고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요구하며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외신이 본 80년 5월은 투사회보 내용과 비슷하다. 21일자 UPI통신 “무장군대, M16난사”, 23일자 아사히신문 “광주사태 긴장 계속, 군은 시 주변 완전 포위”에 이어 24일자 AFP통신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는 광주”이란 기사에서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라며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캄보디아를 능가한다”고 묘사했다.

25일자 UPI·AP통신·뉴욕타임즈 역시 “고립된 광주에서의 참상”이란 기사에서 “일반 시민들은 데모대와 동조하고 있으며 18일 평화적 시위에 대한 공수부대의 야수적 만행을 규탄하고 있다”며 “수많은 사람이 대검에 찔리고 구타당했으며, 수요일에는 군대 발포로 최소 11명 사망, 여기의 상황은 한국의 타 지역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인간사냥’의 실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계엄사는 언론을 통제해 보도를 막거나, “계엄군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등의 허위정보를 유포해 진실을 밀어냈다. 5·18의 첫 기억이 변질됐다.

5·18 진상규명의 필요성

실체가 모호한 범죄를 용서하는 건 사건을 덮는 방식이다.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고, 탑승자 구조가 안 돼 사망한 사건을 언론은 한동안 ‘진도 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보도했다. 사건이 발생한 공간이 아닌 책임 주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몇 주가 지나면서 ‘세월호 참사’가 됐다.

세월호를 은폐하려는 이들은 세월호를 ‘놀러간 안산 학생들이 진도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한정했다. 세월호 가족에게 색깔론을 씌우며 ‘선량한 일반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존재로 매도했다. 그럼에도 2017년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이해하지 않는다. 안산이나 진도의 문제가 아닌 한국사회의 문제,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 지난 3월26일 진도 팽목항 세월호 팽목분향소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3월26일 진도 팽목항 세월호 팽목분향소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모두 3년 넘게 세월호 가족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며 투쟁한 결과다.

5·18은 1979년 10·26이후 찾아온 정치공백, 1980년 ‘서울의 봄’을 상징한다. 서울의 봄은 독재가 무너진 전국적인 민주화 열망을 상징한다. 5월의 학살은 광주만의 사태가 아닌 민주화를 바라는 모든 시민을 향한 신군부의 겁박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는 5월 이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있었고, 서울 등 광주 밖에도 있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신군부는 전차 18대, 장갑차 9대, 500MD 무장헬기 4대, 코브라 무장헬기 2대 등 살상무기를 동원해 4시간 만에 시민군 23명을 죽이고 전남도청을 진압했다. ‘소탕작전’을 완료한 계엄군은 28일 오전 전차 14대와 장갑차 1대를 동원해 광주시내를 2시간동안 누비며 위력을 과시했다. 군부의 퍼레이드는 50여대의 장갑차와 20여대의 군용트럭을 동원해 서울에서도 전개됐다. 시위진압이 아닌 적진을 정복한 모습이었다. 군부는 광주가 아닌 전국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다.

5월의 핏빛 경험은 세월호의 교훈이기도 하다. 국가가 방향을 잃은 자리에 있던 국민이 함께 당한 고통이다. 세월호를 위해 싸웠던 누군가가 진상규명이 아닌 용서를 말하면 세월호도 5·18처럼 어딘가에 갇힐지 모른다. 세월호 증거조사가 필요한 이유는 5·18 재조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80년 5월 계엄상황일지엔 5일이나 일일 결재가 빠져있고, 일지의 일련번호가 섞여있거나 사라져있다. 진실의 빈자리엔 극우세력의 5·18 혐오가 들어서고 있다. 5·18 발포 책임자와 전두환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거나, 5·18의 정확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면 전두환의 주장처럼 5·18은 광주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충돌로 정의될지 모른다.

 5·18 의제 주도하지 못한 언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학생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저항했던 이들이 다수는 지식인·대학생 중심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이들은 죽음을 예상한 채 도청을 향했는데 이 자체가 학생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미국 볼티모어선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가리켜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고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며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1970년대에 비해 80년대에 죽음을 각오하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크게 증가한 계기는 단연 5·18이다.

80년대 학생운동에 반미(反美)가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도 5·18의 영향이 크다. 형식적으론 군 이동시 정부가 주한미군에 통보만 하면 된다지만 당시엔 미국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잘못 알려졌고, 현실적으로도 전시작전권이 없으니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 군 투입이 가능했을 것이란 비판이 나왔다.

실제 미국은 신군부의 과잉진압을 제지하지 않았다. 80년 5월31일 카터 대통령은 CNN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방과 친구, 교역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절해 그들을 소련의 영향권에 넘길 수는 없다”며 “그들 정권이 우리의 인권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전복시킬 수도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세력에겐 5·18의 실상이 알려진 반면 일반 대중에는 군부가 유포한 정보가 언론에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채 퍼졌다. 1980~90년대 주류 언론 중 평균적인 논조를 보인 동아일보만 봐도 언론이 5·18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5·18 초기 ‘비극적인 일’

1980~83년 신군부 통치가 엄혹했던 시기 언론은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분석하지 못했다. 계엄사 발표를 그대로 인용보도하며 하나의 비극적인 사태로 다뤘다. 5.18관련 동아일보의 첫 사설은 발발 엿새만인 5월24일 “유혈의 비극은 끝나야 한다”였다. 사설에서 “이번 광주사태를 맞이해 우리가 바라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 더 이상의 유혈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며 그 수습의 방법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이어야 한다”고 했다.

신군부가 5월 당시 동원했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언론도 그대로 활용했다. 동아일보는 5월26일 “북한은 오판말라”는 사설에서 미국 동향을 다루며 “미국 측의 (이와같은) 즉각적인 대응 조치는 어떤 형태건 북한의 대남적대행우는 가차 없이 분쇄될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1980년 7월4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1면 머리기사 뿐 아니라 광고란을 포함해 3면, 6면 전체에 걸쳐 보도했다. 8월15일자 1면 머리기사 “김대중 등 24명 첫 군재”의 중간제목은 “학생데모 조종·내란 선동”과 “조총련과 손잡고 ‘반한’ 주도”였다. 1면에 이어 4,5,9,11,12면에 걸쳐 김대중을 비판하는 내용을 채웠다. 김대중-호남에 색깔론을 씌우는 게 요지다.

전두환 정권의 강압통치는 83년 말부터 균열이 생겼다. 분위기가 풀어지면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동아일보는 85년에 와서야 이를 말했다. 85년 5월31일 “광주와 개헌 등 결의안”이란 사설에서 진상규명을 주장하면서도 “민정당도 광주사태가 특수상황에서 빚어진 불행한 사태였다고 본다면 그 나름대로 할 말이 있을 법하다”는 양시론적 입장을 취했다. 시기로 보나 논조로 보나 진상규명 담론을 주도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가 88년 4월1일 ‘광주사태 치유방안’을 발표하고 5.18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하면서 새 국면을 맞이했다. 다음날인 88년 4월2일 동아일보는 “광주문제의 시각전환” 사설에서 폭도로 몰린 희생자들 문제를 언급했다.

88년 8월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11월 여야 공동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출범했다. 정치지형의 변화가 확실해진 11월16일 동아일보는 “역사를 찢지말라” 사설에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 수준을 단순히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가능하다.

김영삼 정부가 1993년 ‘광주민주화운동 대국민 담화’에서 책임자 처벌에 유보적 입장을 취해고 용서와 화해를 말했다. 이에 5월16일 광주MBC 일요보도국에서 기자는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습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고 싶다”고 했다. 김영삼 입장을 언론이 나서 ‘도리’라는 도덕적 차원으로 포장했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

김대중 정부가 취임한 1998년 동아일보는 5·18 관련 사설을 전혀 싣지 않으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2000년 민주당 소속 386 출신 국회의원들이 5.18 광주민주항쟁기념전야제 전날 술자리를 벌여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자, 5.18을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동아일보는 2000년 5월26일 “부끄러운 386 정치인” 사설에서 “망월동에 추모하러 간 정치인들이 아가씨들과 함께 음주가무로 밤을 지샌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짓”이라며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386운동권 및 재야출신들”의 분별없는 술자리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서도 5·18을 정권비판도구로 사용했다. 2005년 5월18일 “5.18 민주화운동 25돌에 생각한다”는 사설에서 “이제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맞춰 그 타당성을 되짚어 볼 때”라고 주장했고, 2006년 5월29일 “5.18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사설에선 “모두가 5.18 정신을 말했지만 결국 매표전쟁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37년 간 언론이 윤색한 5·18은 이제 허울만 남았다. 지난해 5월19일 중앙일보는 사설 “5·18 민주화 운동, 통합의 장으로 만들어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는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 등을 거론하며 “더 큰 문제는 행사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하는 장이 되기는커녕 ‘노래 논란’의 싸움터로 전락했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사설 마지막처럼 “이젠 5·18을 정치에서 풀어주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승화시킬 방법을 찾을 때”다.

※ 참고자료

MBC PD수첩 ‘화려한 휴가, 그 못다한 이야기’(2007년 9월4일)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김희송, 5·18항쟁 시기 군부의 5·18담론
변동현 등, 여전히 ‘광주의 5·18’로 남겨졌다
서중석,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최영태, 1980년도의 기사를 통해서 본 조선일보의 정체성
허윤철 등, 한국언론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담론-동아일보의 보도기사와 사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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