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활동가들 속에서는 이번 대선 결과에 실망하고 불만족을 드러내는 여러 반응들이 있었다. ‘홍준표 같은 인간이 2등이라니’, ‘저 거대한 촛불의 결과가 도로 민주당이라니’, ‘심상정이 10%도 못 넘고 고작 4등이라니’, ‘김선동이 1% 근처도 못 가다니’…

전부 다 일리있고 이해할만한 반응이었다. 특히 ‘차별금지법은 나중에’, ‘동성애 반대’를 말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이한 성소수자들의 씁쓸하고 복잡한 마음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큰 그림도 봐야 한다.

5월 9일 밤에 광화문 광장을 찾은 문재인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세월호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가슴에 커다란 노란 리본을 달아주었다. 대선의 결과가 ‘촛불의 승리’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겨울 내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 사드 배치 반대 투쟁중인 주민들이 기뻐하는 장면들이 방송에 등장했다. 곧 있을 5.18 기념식에서는 정부의 방해 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질 것이고, 광주 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더구나 문재인은 취임 초기부터 세월호 재조사, 국정교과서 폐기, 원전 건설 중단 등 속 시원한 개혁 추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대가 워낙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아서, 자기 옷을 자기가 벗는 아주 상식적 행동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다.

지금 ‘기뻐서 눈물이 난건 3년만에 처음’이라는 세월호 가족들에게, ‘희망이 보여서 설레고 눈물이 난다’는 인청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착각하지 마라. 이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급진적 사회변화를 지향해 온 활동가들은 촛불을 들면서 ‘죽써서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촛불혁명 참가자 대부분은 ‘*’를 홍준표와 구여권 세력이라 봤다. 반면 민주당은 이미 지난해 연말 여론조사에서 촛불 참가자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 지지율은 갈수록 높아져 왔다.

촛불집회를 돌아보면, 그 대열 속에서 수많은 민주당 깃발과 지지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촛불의 주역들이 느낄 승리감에 공감하고 대선 결과에 반영된 촛불의 성과를 인정하는 게 출발점으로 보인다.

촛불이 없었다면 야당들과 진보정당이 얻은 표가 구여권 우파 정당들이 얻은 표의 두 배가 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정치적 관심을 모은 대선 TV토론도 촛불의 바탕 위에서 나타났다.

온갖 악랄한 혐오선동을 총동원해 가까스로 2등을 했지만, 홍준표와 자유당은 박사모 부흥회 수준에 머물렀다. 철저히 대구경북과 고령층에 가둬지면서 지지기반은 확 줄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도 집권의 희망 없이 국회의원 몇 석만 보장되는 지역당 외에 아무런 다른 길이 없다.”(조선일보)

안철수는 촛불과 선을 긋고 부패우파에 다가서려 한 치명적 실수로 늪에 빠져 버렸다. 우파는 싫고 민주당은 못미더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며 제3세력으로 급부상했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허물어버린 것이다.

반면 문재인은 ‘정권교체와 적폐청산’을 내걸고 촛불의 등에 올라탔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문재인 정권이 촛불의 정신과 요구를 실현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문재인 당선을 기뻐하고 개혁과 적폐청산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잘못이 없고 탓할 수도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문재인 정부가 지금 보여주는 과감한 개혁 추진을 어느 순간 중단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촛불혁명이 찬란했던만큼 그것이 낳을 실망은 매우 아프고 쓰라릴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정치권력을 교체했지만,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은 여전하다는 게 새 정부 앞에 다가올 어려움이다. 언론권력, 재벌권력, 검찰권력 등은 여전히 같은 세력이 움켜쥐고 있다. 국회에서도 민주당은 아직 소수파다.

추락하던 경제 지표들이 나아지고 있지만,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은 일시적 반등이라는 지적들이 많다. 더구나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에서 트럼프의 ‘전략적 충동’으로의 변화는 새 정부를 어둠 속에서 헤매게 할 수 있다.

재벌, 우파와 기득권 세력은 당장은 숨을 고르며 눈치를 살필 것이다. 하지만 새 정부가 삐걱거리며 빈틈을 보여주면 곧바로 그것을 파고들며 흔들어 댈 것이다. 촛불의 요구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을 힘을 모아서 망치려 할 것이다. ‘트럼프에 거역하고, 기업들을 괴롭히는 친북좌파’라고 새 정부를 공격할 것이다.

물론 이번에 홍준표의 ‘문재인 찍으면 김정은 된다’는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남성)층으로 확장 가능성을 보여 준 신보수 유승민을 주목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지난 ‘종북몰이와 여성혐오의 10년’ 동안 형성된 ‘신보수 안보 지지층’에 대해 말한다. TV토론에서 유승민이 ‘주적론’을 꺼내고 홍준표가 키우고 안철수가 거들던 불길한 조짐은, 특정 상황에서 더 거센 불길로 되살아날지 모른다.

▲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이것은 참여정부의 쓰디쓴 교훈이기도 하다. 결국 참여정부는 우파에 굴복하며 개혁을 포기했고, 오히려 잘못된 정책들을 추진해 환멸을 자아냈다. 그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었다. 이런 앞선 경험 때문인지, 문재인은 자서전 <운명>에서 “참여정부 5년에 대한 복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 이뤄진 것 같지 않다.

군장성 출신 보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종북몰이에 대응한 것부터 그렇다. ‘뉴스타파’ 분석을 보면 문재인 캠프는 주요 5개 캠프중 군인 출신이 가장 많았다. 보수적 군장성들이 문재인의 색깔을 보증해 줄 거란 계산이다.

하지만 막상 남북관계가 꼬이면서 종북몰이가 본격화할 때 그들은 정권의 방패가 될까, 내부총질을 할까? 문재인 캠프에 줄줄이 들어왔던 이명박근혜 부역자들, 중앙일보 홍석현과 갑을노조 파괴자 박형철 등은 과연 개혁 추진의 디딤돌이 될까, 걸림돌이 될까?

최근 참여정부 출신 저명인사들이 내놓는 주장들도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초반부터 전교조, 언론노조, 궤도연대, 부안핵폐기장 반대 시위대 등 좌파에게 얻어맞아 6개월만에 만신창이가 됐다. 그 악몽이 되풀이되면 100% 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는 자기 성찰이 빠져 있다. 왜 임기 초부터 네이스(전자학생기록부), 낙하산 사장, 철도 민영화를 추진해 진보진영과 민주노조의 반발을 샀는지, 왜 부안 주민들에게 힘을 받아서 핵마피아들에 도전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지 않고 있다. 기대를 져버린 참여정부가 진정한 문제였다는 것은 노무현 자신도 인정한 바다.

“확실하게 저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이라크 파병할 때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하면 이를 가는데, 김대중·노무현이는 수용해 버렸다 이겁니다”,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노무현, ‘진보의 미래’)

강대국이나 우파, 재벌들의 압력에 굴복해 보수언론의 지지를 얻으며 추진한 이런 정책 때문에 많은 기층 민중들이 고통받았다. 물론 참여정부는 언론, 재벌 등 기득권 세력의 위로부터 압력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럴수록 아래로부터 힘을 불러냈어야 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그 반대의 길을 갔다. 참여정부 5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 숫자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때보다 훨씬 늘어나 1천여 명에 달했다. 개혁을 원하는 아래로부터 힘에 의존하기보다, 그것을 억누르고 막아선 것이다.

노무현은 나중에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노무현, ‘운명이다’)

그래서 지금 ‘적폐세력에 맞서는 새정권을 돕기 위해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은 당분간 가만히 있으라’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적폐 청산과 개혁 추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힘을 가로막는 게 아닌지 말이다.

촛불 속에서 힘을 모았던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해 이간질하는 세력을 돕는 게 아닌지 말이다. 지난번 차별금지법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던 성소수자 활동가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준 것은 답변을 회피한 문재인보다 옆에서 ‘나중에’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도 돌아 볼 점이 많다. 민주당 집권 10년의 실패와 이명박근혜 9년의 역주행 끝에도 진보정치는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갈등과 분열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촛불혁명 속에서도 이재명이나 민주당에게 기회를 빼앗겼다.

▲ ⓒ연합뉴스
▲ ⓒ연합뉴스

다행히 대선국면에 들어서면서 진보정당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TV토론에서 진보의 존재 가치를 보여주면서 진보정당 후보로서 역대 최다 득표를 이뤄냈다. 특히 소수자들의 편에서 혐오 선동에 맞선 장면은 별처럼 빛났다.

독립적 진보정치의 기반 확대 가능성을 보여 준 이 결과는 오롯이 정의당과 심상정 후보만의 성과는 아닐 것이다. 20년 가까이 힘겹게 바닥을 다지며 씨앗을 뿌려 온 수많은 진보정치 활동가들의 땀과 눈물이 거기에 담겨있다.

하지만 비판적 지지 압력이 크게 줄어든, 다시 오기 힘든 조건 속에서 얻은 이 정도 득표율에 만족하긴 어렵다. 이를 위해 ‘헌법 내 진보’로 뒷걸음질 치며 그 생채기들을 남겨야 했던가? 오히려 그것이 낳은 상처, 불신, 갈등, 분열이 더 큰 전진을 가로막은 것 아닐까?

사라지지 않은 종북몰이의 저주와 갈라진 진보정치의 쓰라린 뒷면을 보여 준 것은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가 얻은 초라한 결과다. 그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종북몰이로 무너진 집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며 밖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배제가 아닌 연대의 손길만이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정치 재건의 길에서 제일 앞줄에 서 있는 정의당부터 먼저 원외 진보정당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자주, 평등, 노동, 생태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졌던 15년 전에 진보정당 지지율이 사상 최고였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 정부에 입각하거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진보진영이 팔짱끼고 민주당 정부 실패만 기다리다가 이삭줍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개혁의 동력을 마련하는 게 진정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당 정부가 개혁을 추진할 때는 그 성공을 뒷받침하고 우파의 방해를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하다. 민주당 정부가 길을 벗어나면 그것을 막아서기 위해서 필요하다. 민주당 정부가 개혁을 포기할 때는 독립적 힘으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 동력의 핵심은 위로부터 똑똑하고 능력있는 진보적 정치인, 장관에게서 나올 수 없다. 취임 초부터 문재인이 보이는 속 시원한 발걸음도 문재인, 조국, 임종석 등의 개인적 의지와 능력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10년에 가까운 지난한 투쟁이 없었다면, 국정교과서 채택율을 0.06%로 만든 학생·학부모·교사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세월호 가족들의 그 눈물겨웠던 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변화가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이 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 최장 기간의 촛불혁명을 만들어낸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이것은 문재인 정부가 참여정부의 실패를 단순반복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핵심적 차이점으로 보인다.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서 그대는 왕들의 이름을 발견한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그리고 몇 번이고 파괴된 바빌론,

누가 바빌론을 몇 번이고 일으켜 세웠는가?

...쪽을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승리.

누가 승리자들의 연희를 위해 요리를 만들었는가?

10년마다 등장하는 위인.

누가 그들을 위해 대가를 치렀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

그만큼 많은 의문.

- 브레히트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이런 아래로부터 동력이 없다면, 진보적 장관과 정치인은 지친 사람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거나 그것을 설득하는 구실을 맡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의 핵심적 과제는 갈등과 반목을 벗어나 아래로부터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촛불혁명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것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의 불씨를 더욱 살리고, 그것을 우리의 일터와 삶터로 옮겨 붙여야 할 때다. 소속과 부문과 정파를 넘어서 공동의 과제를 위해 협력하고, 수많은 열린 토론을 벌이고, 경험 속에서 서로 배우며 하나씩 오류를 고쳐 나가던 장면을 기억하자.

강간모의 공범 홍준표가 2등을 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말한 유승민이 20대 남성들에게서 큰 지지를 얻었다는 결과 앞에서, 여성 혐오적 표현과 발언들을 경계하며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 광장의 기억을 되살리자.

노조도 없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떼거지로 죽어가고, 노조가 있어도 힘이 없으면 고공으로 올라가고, 힘 있는 노조는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 일이 더 반복되지 않게 하자. 종북의 올가미에 걸려서 허우적대는 활동가들과, 종북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사리는 활동가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활동가들이 모두 서운함과 불신을 쌓아가던 상황을 끝내자. 지난날 촛불의 기억과 꿈이 우리를 밀고나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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