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12일 밤, 홍두표 TBC 전무에게 전갈이 도착한다. 보낸 이는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 “내일 아침 8시까지 홍진기 TBC 회장을 모시고 장관실로 오라.” 다음날 김 장관은 홍 전무를 비서실에 대기시킨 채 홍 회장과 30분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홍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삼성을 그만두겠소? 방송을 그만두겠소?”

언론계에 떠돈 이야기에 따르면 김 장관과 면담을 마친 홍 회장은 문화공보부에서 서소문 중앙매스컴까지 가는 차 안에서 진정제를 복용했다. 홍 회장이 홍 전무에게 “당분간 피해있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역시 나돌았다. 홍 회장은 회사로 돌아온 직후 TV와 라디오 총 책임자인 홍 전무의 보직을 해임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도국 국장 직무대행을 하던 강용식 부국장의 보직도 해임됐고 그 뒤 10월9일 박광춘 사회부 차장은 편집부로, 국회 취재반장이었던 이민희 기자는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로, 신민당 취재팀장이었던 노재성 기자는 농림수산부 담당 기자로 각각 전출 발령됐다.

김 장관이 홍 전무에게 전갈을 보내기 직전, 박정희 대통령이 김 장관을 호출했다. “이병철 (삼성) 회장이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신문, 방송을 허가해줬더니 YH 사건이 뭐라고 뉴스 시간마다 내나? 방송 문 닫으라고 해. 신문도 그만두라고 해.” 박 대통령의 지시부터 방송 책임자들의 보직 해임까지 걸린 시간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 경찰이 마포 신민당사에 난입 농성중이던 YH 여공들을 해산시키며 파괴한 집기들과 당사 내부. 사진=연합뉴스
▲ 경찰이 마포 신민당사에 난입 농성중이던 YH 여공들을 해산시키며 파괴한 집기들과 당사 내부. 사진=연합뉴스
“이병철 회장이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 허가해줬더니…”

문제가 된 보도는 단 두건에 불과했다. 8월12일 오후 5시20분, TBC뉴스는 경찰에게 진압당한 신민당사 안팎의 모습을 1분20초 길이로 보도했다. 신민당사 2층에 위치한 총재실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흩어져있었고 전화기는 부서져있었다. 문짝은 떨어져 나갔고 농성 중인 국회의원들은 허탈감에 빠진 표정이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이민희 TBC 기자에 따르면 신민당 4층 강당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앉아있었다. 연단에는 “박정희 정권은 단말마적인 발악을 중단하라”는 플랜카드가 걸렸다. 신민당사 건물 바깥벽에는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태극기에 검은 리본을 맨 조기가 매달렸다.

뉴스가 나가자마자 중앙정보부는 TBC에 전화를 걸어 “다시 내지 말라”고 말했다. 김덕보 TBC 대표이사와 홍두표 전무 역시 기자들에게 “다시 내지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다시 뉴스를 내보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기자들은 당직 데스크였던 박광춘 차장을 설득해 9시 종합뉴스에도 방송을 내보낸다.

“YH 사건이 뭐라고 뉴스 시간마다 내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처럼 YH 노동자 투쟁은 초기만 해도 노동쟁의 이상이 아니었다. 1979년 7월31일 동아일보 “회사를 살려주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7월30일 YH무역 종업원 270여명이 3층 강당에 모여 도산직전에 있는 회사를 정상가동 시켜줄 것 등 7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4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8월6일 오후 5시, YH무역 정문에 폐업공고가 걸린다. 회장의 외화 빼돌리기와 무리한 사업 확장, 제2차 석유 파동 등으로 인한 폐업이었다. 관리직원들은 공장을 떠났고 여성 노동자들만 공장에 남았다. 이들이 지내던 기숙사에는 물과 전기마저 끊겼다. 그럼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남아서 농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시적인 검열에 시달렸던 언론은 노동문제에 침묵했다. 당시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였던 인명진 목사는 “언론이 무슨 말 한마디 했습니까. 광릉에서 크낙새 한 마리가 죽으면 신문에 사회면 탑으로 났지만 여성노동자들 굶어죽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죽고 손가락 잘리고 이거 한 줄도 보도 안 했어요”라고 말했다. 인 목사는 최근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 YH 여성노동자들. 사진=다큐멘터리 <꽃다운></div>
                                <figcaption>▲ YH 여성노동자들. 사진=다큐멘터리 <꽃다운></figcaption>
                                </figure>
                                </div></div><div><b><font color=단 5분의 면담시간 “감의 정치인, 김영삼의 최고의 직감” 

그렇게 묻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농성장소를 옮기자는 것이었다. 회장인 장용호가 미국 시민권자이니 미국 대사관에 가서 농성하자, 회사의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에 가서 농성하자, 정부 여당의 책임이 크니 여당인 공화당에 가서 농성하자,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 가서 농성하자 등등의 주장이 나왔다.

미국대사관이나 공화당사는 경비가 삼엄해 뚫고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조흥은행은 바로 경찰이 투입될 것이 뻔했다. 남은 곳은 신민당사 뿐이었다.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8월9일 새벽이 되자 목욕이라도 가듯이 작은 대야를 들고 네댓 명씩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노동자들이 몰래 마포의 신민당사로 옮겨가는 동안 문동환, 고은, 이문영 등 당시의 재야인사들은 상도동 김영삼 총재 집을 찾아갔다. 김영삼은 야당 당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으니 그들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면담시간은 딱 5분, 훗날 역사학자 한홍구는 “감의 정치인 김영삼의 최고의 직감”이라고 평가했다. 

8월9일 아침, YH 여성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 진입에 성공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정당의 당사를 점거한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신문들은 그날 석간부터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최순영 전 의원은 “우리 억울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 너무나도 기뻐서 울었어요”라고 말했다.

▲ 1979년 8월11일 동아일보 7면 보도
▲ 1979년 8월11일 동아일보 7면 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979년 8월11일 동아일보 7면

최순영 전 의원이 보고 울었다는 기사는 8월9일자 동아일보 석간 기사다.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YH 무역여공들”이라는 제목의 사진 기사 속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신민당사 4층에 모여 있는 모습이 담겼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당시 언론보도에 대해 “민주노조의 활동에 대해 언론들은 당국과 마치 짠 것처럼, 정권이 하라는 대로 왜곡해서 아주 나쁘게 기사를 쓰거나 또는 대부부분은 아예 안 써버렸다”면서 “하지만 YH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8월11일과 13일 동아일보 보도도 주목할 만하다. 경찰의 강제진압이 있던 다음날인 8월11일자 사진 기사에 대해 서중석은 “끌려가면서 닭장차에서 울부짖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7면 사진, 그건 영원히 잊을 수 없다”며 “동아일보가 우리 언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보도를 이 이틀 치에서는 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들어가면서 YH 무역 사건은 한 회사의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국의 뇌관으로 프레임이 확대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만24시간 된 8월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는 신속한 강제해산을 결정했다. 한홍구는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에는 유신체제가 너무나 경직돼 있었다”고 평가했다.

강제진압 움직임이 보이자 여성노동자들은 8월10일 긴급 결사총회를 연다. 총회에서 나온 결의문에는 경찰이 진입하면 모두 투신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8월11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영삼 총재는 당사 정문 앞에서 황용하 마포서 정보1과장과 마주치자 “너희들이 정말 저 여공들을 뛰어내리게 할 참이냐”며 뺨을 때렸다.

▲ YH무역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경찰에 의해 당사 밖으로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YH무역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경찰에 의해 당사 밖으로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벽 2시, 경찰 2000명, 23분 만에 신민당사를 진압하다 

8월11일 새벽 2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세 번 울린다. ‘101호 작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성춘 한국일보 기자에 따르면 누군가 새벽 1시50분께 “경찰이 쳐들어온다”고 방마다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마포 일대에 전원을 꺼버린 것이었다.

“쳐들어온다” 라는 고함소리와 동시에 경찰들은 긴 사다리를 통해 신민당사로 진입했다. 동원된 경찰은 2000여명이었다. 4층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엄마 나 죽어” 등의 비명을 질렀다. 사무처 요원들은 각방을 두드리며 “2층 총재실로 모이라”고 공지했다. 2층 총재실에는 국회의원, 당직자, 기자들이 모였다.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을 먼저 진압한 다음 총재실 벽을 부수고 들어왔다. 8월11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몇몇 청년당원들은 재떨이를 던지면서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관들이 순식간에 이를 제압해 박권흠 대변인 등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당사 밖으로 끌려나왔다.

기자들도 다쳤다. 이성춘 기자의 기록에 따르면 노재성 TBC 기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 순간 무언가가 날아와 노 기자의 머리가 찢어지면서 뒤에 있던 사람의 셔츠와 얼굴에까지 피가 튀었다. 사진기자들은 경찰관들에게 필름을 빼앗기거나 땅바닥에 짓밟혔다. 완전 진압에 걸린 시간은 ‘23분’이었다.

“경찰이 받아서 살았다”던 김경숙, 죽어서 발견되다  

진압 이후 노동자 김경숙이 1층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그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새벽 2시30분께 숨졌다. 이틀 뒤인 13일 오후 3시50분, 서울 강남구 시립강남병원에 영안실이 마련됐다. 하지만 장례는 어머니, 외삼촌, 동생 등 가족3명과 경찰 관계자만이 참석한 가운데 3분 만에 치러졌다.

‘자해투신’. 경찰이 발표한 김경숙의 사인이다. 8월13일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경찰은 김씨가 건물 뒤쪽 북쪽 창가에 기대 있다가 밖이 소란해지자 스스로 투신 했다고 발표한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투신 시간은 오전1시30분, 경찰이 신민당사에 진입하기 전이다. 

이마저도 두 번이나 번복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경찰의 첫 번째 발표는 ‘경찰 진입 후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아서 살았다’였다. 이후 경찰은 ‘동맥 절단 후 투신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것이 자해투신이었다. 

경찰 발표와는 달리 신민당 사인규명조사반은 경찰이 진입한 이후 김경숙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도를 보면 그나마 동아일보가 신민당 조사반의 발표를 자세하게 보도했고 타사는 단신으로 처리했다. 당시 이에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이 있었다면 김경숙의 사인은 조금 더 빨리 밝혀졌을지도 모른다. 

▲ 1979년 8월9일 동아일보 보도
▲ 1979년 8월9일 동아일보 보도
‘배후세력’ 프레임은 30년 전에도 있었다 

정부와 여당은 ‘배후세력’과 ‘신민당의 선동’ 이라는 프레임을 짠다. 오유방 공화당 대변인은 당장 진압이 있었던 11일 “일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은 근로자들을 당사 안으로 유도, 선동 가세함으로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신민당측에 그 책임이 있다”면서 김영삼을 겨냥해 “폭력을 조장, 혼란을 선도함으로써 뒷골목 정치인으로 타락했다”고 말했다.

유신정우회(유신회) 정재호 대변인도 이날 성명을 내어 “이번일은 고용주와 피고용주간에 빚어진 순수간 노사분규를 정치적으로 확대 악용하려는 배후세력의 불순한 지도에 의한 불행스런 사태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유신회는 유신체제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만든 단체였다.

이틀 뒤인 13일, 이런 프레임은 그대로 작동한다. “YH 여공 농성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서경석씨, 도시산업선교회 지도목사 인명진씨, 전 교수 이문영씨, 목사 문동환씨, 시인 고은씨 등 5명이 입건”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도시산업선교회가 배후세력의 핵심으로 지목됐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15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실태조사를 위한 합동조사단까지 꾸린다. 이들은 “도시산업선교회 일부 인사들이 그동안 여러 형태의 노사분규에 깊숙이 개입한 경위에 대해 사회정책적 차원에서 조사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 여당의 이러한 입장을 잘 대변한 매체 중 하나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은 8월13일 사설에서 “우리는 이번 사건의 배후에 혹시라도 불순세력의 조직적인 선동이 있었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또 그럴 위험성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다는 현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16일 사설에서도 “기업의 도산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여성 근로자들의 순수한 자구적 시위는 문제된 불순세력과 정당의 틈바구니에 끼여 변질이 되어버린 꼴이 됐다”면서 “다같이 협력할 시기에 부채질이나 하는 불순세력이 잠동한다면 이는 마땅히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해서는 “그 독특한 선교활동 때문에 이미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복음적이다, 불순단체다, 심지어는 용공주의라는 시비까지 여러 차례 있어 온 미션단체로 알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유정회의 입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 YH 노동자 김경숙 사원증. 사진=다큐멘터리 &lt;꽃다운&gt;
▲ YH 노동자 김경숙 사원증. 사진=다큐멘터리 <꽃다운>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프레임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YH 사건이 김영삼과 박정희의 극한 대립 순간에 터졌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18일간 농성을 지속했고 그 과정에서 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됐다. 그리고 이는 부마항쟁으로 연결된다. YH 사건이 터지고 두 달 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을 맞고 숨졌다. 

배후세력으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목한 것 역시 70년대 민주화 세력 중심이었던 기독교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홍구는 “유신체제 억압에 대한 불만은 널리 퍼져있었지만 1979년 상반기에는 그 불만이 저항으로 표출되지 못했다”며 YH 여성 노동자들이 그 ‘위장된 태평성대’를 깼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김경숙의 사인은 30년이 지나서야 밝혀진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김경숙의 부검 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었고 곤봉과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사망 시각 역시 경찰이 신민당사에 진입한 이후로 밝혀졌다. 

“당시에 조합원을 모아서 김경숙을 본 사람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는데 본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본과 국가가 김경숙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이렇게 정리했어요. 그런데 30년 지나서 알고 보니 지네가 죽였어. 떨어진 곳도 세 번이나 바뀌고. 지네들이 떨어졌다고 한 곳엔 창문도 없어. 동맥 절단도 안 했고.” 김경숙의 동료 최순영 전 의원의 말이다. 김경숙의 죽음이 제대로 보도됐다면 세상은 전태일과 더불어 김경숙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1970년대를 두고 혹자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 박정희의 죽음으로 끝난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YH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고은 시인은 1970년대를 이렇게 정리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참고문헌
서중석, 서중석의 현대사이야기
한홍구, 유신-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이민희, 해외특파원이 된 교열기자
이성춘, 언론생활 45년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