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는 정치인에 대한 민심의 지지율이 늘고 있다” - 이것은 언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치보도의 내용이다. 주군의 지지율이 올라간다니 No의 지지세력은 환호할지 모른다. 민심을 먹고 사는 정치가 언론보도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다. 여기 문제는 과연 언론이 민심을 반영하느냐 아니냐이다. 언론보도는 과연 민심과 일치할까.

예컨대, 나는 잔인한 살인 사건을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동차끼리 충돌하는 끔찍한 장면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사건·사고가 일어날까 두려운 마음 없지 않다. 당신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엇보다 언론보도 때문이다. 사실상 당신과 무관한 세계의 일임에도 연일 터져 나오는 뉴스가 당신의 일상을 지배한다. 더구나 뉴스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달리 말해 질이 아닌 양에 지배당한다. 여기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능력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보도량이 많은 뉴스가 화두가 되고 우리의 의식을 압도한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진리도 어쩌면 언론이 많이 보도해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식은 언론에 종속되어 있다. 많이 보도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인식 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언론은 우리의 눈과 귀일뿐만 아니라 머리이고 마음이다. 이렇게보면, 우리의 마음은, 민심은 언론에 반영된 것이 아닌 그 반대이다. 오히려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민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까 여론과 민심은 그 태생이 다른 것이다. 이 서로 다른 형식의 양자는 그 내용이 일치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이 일치할 때는 보도량이 많을 때이다. 많이 보도되면 여론이 될 뿐만 아니라, 민심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이름까지 얻게 된다. 양이 질이 되는 미디어의 양질전화 법칙이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 4월15일자 TV조선 보도화면 갈무리.
▲ 4월15일자 TV조선 보도화면 갈무리.
이번 대선은 정치와 언론, 여론과 민심에 대해 많은 물음을 던졌다. 종편채널들을 중심으로 난무한 여론조사와 이를 경쟁적으로 내보낸 언론보도들은 민심과 일치할까. 양질전화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을까. 예컨대, 지난 총선의 경우, 수많은 여론조사를 통해 여론을 “만들어”냈지만, 이 법칙은 작동되지 않아 이른바 메이저언론들의 체면을 많이 구겼다. 당시 종편채널과 이른바 메이저신문들을 중심으로 연일 터져 나오는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 거기에 ‘공천’, ‘컷오프’, ‘친박’, ‘비박’, ‘친노’, ‘친문’과 같은 정치공학적 담론들, 그리고 이어지는 각종 함량미달의 여론조사들... 여기 민심은 담겨 있지 않았고 그것은 어떤 언론도 예측하지 못한 절묘한 선거 결과로 나타났었다.

이번 대선은 어떠한가. 각종 흑색선전과 가십성 보도, 경마식 보도 등 민심과 동떨어진 대선 시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종편채널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국민TV가 진행한 대선보도 감시 프로그램의 패널로 참여하면서 종편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본 나로서는 수술을 하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있는 환자의 속내를 바라보는 외과의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컨대, 지난 여러 차례의 대선에서 후보들의 포스터를 비교하며 얼굴 크기가 당선 기준이라며 나름 진지하게 접근한 채널A나 SBS의 세월호 거래 오보를 확대·재생산한 TV조선 같은 경우는 퇴출 밖에는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언론이 민심을 대변하다는 생각은, 언론이 만들어낸 여론이 곧 민심이라는 생각은 사실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 그것은 저 멀리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훈구파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림파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3사를 장악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거나 심지어 왕의 잘못을 비판하기도 한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기관이기도 했다. 이 언관직의 사림파가 내세운 정치는 이른바 왕도정치였는데, 왕조차 민심에 역행해서는 안 된다는 민본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경국의 기반을 민심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신문도, 방송도, 더구나 SNS도 없던 시절 왕은 어떻게 민심을 알 수 있었을까. 해답은 3사에 있었다. 3사의 견해가 여론이고 곧 민심이었다. 사림은, 언관직은 이렇게 왕권 위에 군림한다. 변질된 붕당정치가 예송논쟁으로,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를 거쳐 구한말 사대주의 기회주의자로 이어지는, 저 유명한 사색당파의 공허한 논쟁 속에서 이 언관직들이 과연 얼마나 민심을 반영했겠는가. 예송논쟁이라는 멋스런 이름으로 불린 제사문제는 과연 얼마나 민생과, 민심과 상관있는가.

2017년 5월 대한민국 언론의, 무엇보다 JTBC를 제외한 종편 3사는 민심을 대변한다고 자부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권력을 꿈꾸는 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들의 언론권력에 굴복하라고 주문한다. “No라는 정치인에 대한 민심의 지지율이 늘고 있다”는 뉴스와 그에 걸맞는 여론조사를 연일 보도하면 그것이 곧 민심이 된다고 유혹한다. 보도량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인식지도는 이런 언론의 유혹에 자신감을 더한다.

민심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도량에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것은 지난 총선이었다. 언론이 민심의 진정한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량 보도하지 않으면 미디어 양질전화의 법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언론의 펜은 곧 칼이요, 양날의 칼이다. 한쪽 칼날은 ‘법칙’이요, 다른 한쪽은 유혹이다. 후자를 택한 정치인 No는 그것이 Nothing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유혹에 속아 종편 3사 같은 허망한 방송을 믿어서는 안 된다. 미디어 양질전화 ‘법칙’을 잘 알아야 한다.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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