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파 세력에 기반한 후보가 일찌감치 당선권에서 멀어진 역사상 최초의 대선. 촛불의 힘과 성과가 반영된 ‘촛불 대선’은 이처럼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마련했다. 얼마 전까지 민주당 후보와 민주당에서 갈라진 후보가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더구나 심상정 후보도 예전같은 언론의 외면과 무시를 당하지는 않고 있다.

우파 후보들은 완전히 사분오열돼 있는데, 마치 진보정당들의 초기와 어려웠던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보수의 독립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독자파’, 보수진영의 대통합이 필요하다는 ‘통합파’, 당선 가능한 야권 후보를 지지하고 동맹을 맺자는 ‘비판적 지지파’가 등장해서 서로 치고받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색깔론도 전 같은 파괴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번 대선은 촛불 투쟁을 뒤틀리고 부족하게 반영하고 있다. 대선 TV 토론에서 수화 통역이 화면 귀퉁이에 거의 보이지도 않게 나오는 것만 봐도 촛불집회 무대와 매우 대조적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촛불집회에서 마이크도 못 잡던 정당의 후보가 ‘1강’이고, 집회 근처에 얼씬도 않거나 못하던 정당의 후보들이 ‘2중’이고, 가장 촛불 투쟁의 대의를 잘 대변하는 후보가 ‘2약’중 하나이거나 보이지도 않는 것도 참 못마땅한 일이다.

우파는 거리와 광장이 아닌 선거와 공식정치권이라는 ‘홈 그라운드’로 축이 이동하자, 곧바로 뒤집기를 시도중이다. 안보 쟁점화, 종북몰이, 여성과 동성애 혐오 등이 이들이 꺼내든 카드다. 상대 후보들을 ‘친북좌파’라고 낙인찍거나, ‘종북세력과 갈라서지 않았냐’며 이간질도 서슴지 않는다.

▲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일 오전 경북 영주시 태극당 앞에서 열린 거점유세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일 오전 경북 영주시 태극당 앞에서 열린 거점유세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특히 홍준표는 지금 우파 ‘코아’세력의 결집에 주력하고 있다. 중도파 견인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우파 핵심을 묶어세워서 새정권 하에서 반격과 다음 선거를 노리겠다는 계산이다. 툭하면 ‘칼빈슨호가 오고 있고 선제타격도 할 수 있다’며 겁을 주고, 입만 열면 ‘종북좌파’, 민주노조,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다.

벌거벗은 우파 본색을 흉측하게 드러내는 이 여성혐오적 강간모의 공범이 아직도 후보로 있고, TV에 나와 웃고 떠든다는 건 1초도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홍준표가 끝까지 완주하고, 표까지 꽤 얻는다면 이 나라가 ‘여혐민국’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반면 유승민은 촛불을 거치면서 왼쪽으로 이탈해간 우파 지지층을 따라가서 마음을 얻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안철수라는 더 강한 경쟁자가 있는데다, 전통적 우파 지지층까지 홍준표에게 빼앗기다 보니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겪이 돼 버렸다.

안철수는 원래 민주당 오른쪽에 ‘제3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들이 다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설자리가 줄어들어 왔다. 대안없는 우파 지지층이 그에게 잠시 대거 몰리기도 했었지만 홍준표의 등장 이후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있다.

결국 촛불을 거치면서 ‘길가다가 지갑주운’ 사람은 바로 문재인이다. 그는 현재 전통적 지지층에다가, 안철수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지지층, 진보의 사분오열 때문에 갈 곳이 없던 진보 지지층까지 다 묶어세우며 4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심상정 후보가 얻는 지지는 대부분 실력과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다. 오랫동안 갈고닦은 진보적 정책과 주장들이 촛불을 통해 급진화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13명의 중년남성 후보들 속 유일한 여성후보이자 여성주의자 후보, 남성중심의 한국사회와 운동사회에서 싸워 온 여성, 이것만으로도 심 후보를 지지할 의미는 작지 않다.

▲ 지난 2일 MBC에서 열린 19대 대선 후보 마지막 TV토론회에 참석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지난 2일 MBC에서 열린 19대 대선 후보 마지막 TV토론회에 참석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TV 토론에서 동성애 찬스 발언은 분명 큰 감동이었다. 심 후보가 거기 없었다면, 홍준표가 설치는 꼴을 보기 훨씬 괴로웠을 것이다. 우파 후보들은 처음에 트럼프의 불장난에 힘입어 북핵, 북한인권 등을 쟁점으로 TV토론을 ‘사상검증 대회’처럼 만들려고 했다.

역시 우파의 무기와 고리는 ‘북한과 안보’였다. 이것만 꺼내면 자유주의 세력과 일부 진보세력까지 입이 언다는 걸 우파는 잘 알았다. 그러면서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던 안철수는 갈수록 우향우했고, ‘합리적 보수’라던 유승민은 ‘한미 합동 선제공격’을 운운하며 더 섬뜩한 우파 본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특전사 군복입고 폼이나 잡던 문재인은 역시 우파들의 입을 막기 어려웠다. 그는 ‘참여정부 때 국방비가 더 높았다’는 자랑이나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심상정 후보의 존재는 빛났다. 일부에서는 ‘왜 우파와 같이 문재인을 깠냐’고 했지만 심 후보는 분명히 주로 왼쪽에서 문재인을 비판했고 그것은 진보 후보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아쉬움도 컸다. 진보 후보라면 미국과 우파야말로 한반도 평화 위협의 주범이고 북한핵을 자초했으며, 이를 이용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해 왔다고 폭로했어야 했다. 더불어 미국과 우파에 굴복해 껍데기 ‘햇볕’에 그친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를 지적해야 했다.

하지만 심 후보의 대응은 여러가지로 부족했고, 듣다보면 찜찜한 의문들이 떠올랐다. 전술핵은 안되지만 미국 핵우산과 전략무기는 되는가? 2007년에는 기권이 맞지만, 지금은 인권결의안 찬성과 대북제재가 당연한가? 사병 인권과 복지가 ‘안보 강화와 선진강군’의 수단인가? 이집트 [독재자]사다트와 [테러국가]이스라엘 라빈에게 배워야 하는가?

유승민이 ‘통진당에서 북한 문제나 종북 세력과는 관계를 잘 정리하고 나오셨다’고 칭찬할 때, 홍준표가 툭하면 ‘이정희’ 운운하며 여성혐오적 마녀사냥을 입에 올릴 때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심 후보는 못들은 척 넘어갔다. 더구나 심 후보는 여전히 민주당과의 동맹이나 연립정부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것은 심 후보와 정의당이 박근혜 정권의 종북몰이에 굴복하면서 만들어진 한계이다. 당시 정의당은 탄압에 직면한 동지들을 외면하고, ‘헌법 내 진보’의 길을 택했다. 그 덕에 기성질서 내에서 살아남았고 많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씁쓸한 타협은 다양한 측면에서 심 후보와 정의당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면 비초청 후보 TV 토론을 찾아보면, 종북몰이에 의해 기성질서 밖으로 쫓겨난 진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홍준표 아류들(조원진, 남재준 등)이 빻은 말 대잔치 중인 악조건 속에서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는 대선 국면에서 누구도 않던 주장들을 했다.

▲ 김선동 민중연합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김선동 민중연합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미국 핵우산을 인정하고 대북제재에 찬성하면 안 된다. 트럼프의 무력시위에 항의해야 한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도 박근혜의 핵심 적폐다. 정치탄압 희생양 이석기 의원은 석방돼야 한다. 광화문 광고탑에서 6명의 노동자가 열흘 넘게 단식 중이고, 드라마 젊은 조연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누군가에겐 불편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절실했을 말이다. 김 후보는 이런 주장을 통해서 ‘굳이 3억이나 내고 따로 출마해야 했나’라는 의문에 답했다. 사실 심상정, 김선동 두 후보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통합진보당 출신이고, 야권연대에 집착했었고, 종북몰이에 시달렸다.(물론 한쪽은 우박을 맞으며 더 강경해졌고, 한쪽은 동지와 선을 그으며 살아남았다.) 포스터에 세월호 노란리본을 넣은 유일한 후보들이며 사드 반대, 비정규직 철폐, 차별금지법 제정 등 핵심공약들도 비슷하다. 둘 다 민주노총이 선정한 공식 지지 후보다.

따라서 두 후보가 만약 ‘진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서로의 장단점들을 보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을지 모른다. 진보 지지자들이 두 진영 사이의 감정적 갈등과 반목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일도, 누굴 찍고 어떤 입장을 낼지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사회당 이탈파와 공산당, 급진좌파들이 힘을 모아서 좌파의 목소리와 힘을 과시한 프랑스 멜랑숑의 사례처럼 말이다.

하지만 심 후보 측은 독자적 힘으로 충분하다고 봤는지 그런 연대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김 후보 측은 묵은 감정을 풀고 손을 잡을 준비가 안 돼 보였다. 단일화는 무산됐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도 관련 안건은 무산돼 버렸다. 많은 활동가들이 문재인(또는 이재명) 캠프로 건너 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을 대체할 진보정치의 독립적 대안을 바라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진보진영의 사분오열에 넌더리를 내면서 야당 후보 캠프로 옮겨가는 게 미래를 위한 옳은 선택이었을까? 진보의 독자적 세력화는 또 ‘나중에’라면서?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이명박근혜’ 시대의 반동적 정책들을 추진했던 장본인들이 문재인 캠프로 줄줄이 영입되는 걸 보면서 크게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문재인의 발언을 뭐라고 변명할지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문재인 비판적 지지의 심정은 이해되지만, 그것은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고 발목만 잡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심상정 후보에 대한 집중 투표를 통해서 진보정치 세력화를 추구하는 게 유일하게 남은 대안인가? 김선동에 대한 투표는 너무나 미미해서 무의미한 ‘사표’가 될 것인가? 김선동 지지자들은 외면당하고 실패하면서 결국 정의당 주도의 진보통합으로 떠밀려올까?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은 이런 식으로 잊혀지고 ‘완성’될 것인가?

하지만, 김선동 후보가 얻을 적은 득표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심상정 몰아주기’보다는 민주노총처럼 두 명의 진보 후보(심상정, 김선동)중에서 선택을 호소해야 할 적어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회운동에서의 조직력과 투쟁력으로 볼 때 김선동 후보측은 예상되는 선거 득표수만을 잣대로 해서 간단히 무시될 수 없다.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에 중요한 기반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민주노총도 두 후보 모두 ‘지지 후보’로 정한 것이다.

둘째, 이처럼 진보진영의 중요한 일부분을 설득하거나 마음을 움직이려는 노력없이, 선거 득표수와 결과로 압박한다고 진보의 통합과 연대가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간의 감정적 반발과 불신만 더 깊게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원외 진보정당들을 배려하고 손을 내밀기보다, 굽히고 들어오라는 식의 정의당의 태도는 유감스럽다.

셋째, 누구에게 투표할지 고민할 때 단지 예상 득표수만이 아니라 가치를 놓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심상정에는 부족하고 김선동에는 존재하는 종북몰이에 대한 불복종, 강대국 패권에 대한 반대 등은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이다.

넷째, 핵심은 대선 이후 투쟁과 연대를 위한 정치적 준비로서 이번 투표의 의미다. 대선 이후 새정권은 곧바로 사드, 최저임금, 차별금지법 등에서 미국과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압박에 직면할 것이다. 우파는 개혁 지지자들과 진보진영을 친북좌파라고 종북몰이하며 우파 결집을 시도할 것이다. 새정권은 이런 압박에 타협하면서 실망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 진보정치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당과는 독립적으로 종북몰이와 이간질에 단호하게 맞서며 진보진영의 연대와 투쟁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그 점에서 진보의 연대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립정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고, 종북몰이에 타협해 온 심상정 후보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진보 후보 중에서 선택이 더 나은 입장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언론뿐 아니라 일부 진보진영까지도 그 존재와 목소리를 외면하는 속에서 진행 중인 김선동 후보의 외로운 고군분투를 응원한다. 나아가 이왕이면 그간 부족했던 여성, 소수자, 환경 문제에서 말을 넘어서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심상정 후보는 이 기회가 혼자 힘으로 얻은 게 아님을, 누구의 눈물이 그 길에 깔려있는지 잘 알 것이다. 따라서 우파를 닥치게 하고 자유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며 진보의 존재 이유를 계속 보여줘야 한다. ‘종북세력과는 갈라져 나오지 않았느냐’는 낙인찍기, 이간질에 더는 참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심상정 후보가 제시한 정책과 의미있는 득표는 대선 이후 진보진영의 연대와 투쟁을 위한 소중한 종자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김선동 후보가 제시한 정책과 크지 않겠지만 중요한 득표도 보태어져야 한다.

나아가 비록 독자적 후보는 못 냈지만 중요한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고 운동에 기여해 온 노동당, 녹색당, 변혁당 등의 목소리도 기억돼야 한다. 이번 대선이 진보진영 갈등의 골을 깊게 하기 보다는, 화해의 실마리를 마련하며 이후 연대와 투쟁의 디딤돌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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