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그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 순간, 앞으로의 결정들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기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미친 듯이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도 같을 것이다. 남성을 결정한 것은 당신이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글은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계기들로 인해 페미니즘을 접한 그 순간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말하면, 계기 없이는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나의 찌질한 이야기이자,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스물의 그들은 몰랐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나타나는 차별들에 점점 숨을 가빠했다. 여성의 역할을 요구했고 여성으로 살아가길 강요받았다. 그들이 느낀 주변의 눈빛은 이마트에 높이 쌓인 예쁘장한 인형들을 고를 때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상자 안에 담겨 비닐 시트지 너머의 자신들을 고르고 있는 행복해 하는 눈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물의 나에게 ‘너의 눈빛도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듣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몸서리치게 노력한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삐딱하게도 바라보고 이런 저런 활동들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눈빛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었다.

모든 것에 지쳤을 때쯤 문득 그들이 나에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그들을 구석구석 훑어본 뒤 나를 쳐다본다. 묻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자격과 능력을. 그런 시선에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나의 눈빛은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훑어본 그 사람과 같은 눈빛이다.

주변은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너와 연인 관계인지, 친구 관계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주변은 그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하나씩,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단지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는 불편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깨달았다. 주변이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생각하고 했던 말들이었음을. 산더미 같이 쌓인 인형들을 웃으며 고르고 있는, 시트지에 뿌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보던 사람이 나였음을.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숨을 가빠하며 시트지를 손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묻어난 그 얼룩진 손자국 하나하나에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입김으로 보이지 않게 덮어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입김 위에 나의 숨을 포개지 않기로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선택한 순간은 이렇게 축축했다.

선택 이후의 세상은 상자로 가득했다. 집, 학교, 직장에는 모두 켜켜이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모두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 얼룩은 아이와 야근에 시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며 막차 시간을 다급하게 확인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지하철에서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우리가 상자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순간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상자가 아닌 당신 나름대로의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본 그것의 어딘가에는 아픔과 분노가 묻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가족을 통해, 친구를 통해, 뉴스를 통해, 그 가슴 아픈 순간이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그 얼룩들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생물학적으로 남자, 특히 이성애자라면 우리는 젠더 위계에서 가장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이다. 동시에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을 삼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했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남성성에 괴로워하며 페미니스트의 자격과 의무를 이리저리 따져보았는가. 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데이비드 J. 커헤인(David J. Kahane)은 「남성 여성주의라는 모순 어법」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하는, 혹은 현재 하고 있는 남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허식가(the poseu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실천하게 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부장적 환경과 직장 상사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성인 것과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단지 페미니스트로 인지되길 바랄 뿐이다. 따라서 자아성찰에 따른 고통은 없다.

두 번째는 내부자(the inside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도 하며 책임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가부장제와 같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해악들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하지만 그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고민이 자아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지지를 한다. 자신의 애인이, 동료가, 친구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변화한다는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인본주의(humanism)자이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부장제의 이익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부장제로부터 어떻게 억압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로부터의 억압 부분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남성이 되길 바라며, 여성적 특성과 더욱 관계 맺기를 바라지만 초점은 남성들 간의 경쟁 약화,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 증가와 같은 남성들의 복지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가부장제의 폐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 번째는 자기 학대자(the self-flagellator)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성차별적 충동, 과거에 현재에 대한 죄책감과 끊임없이 싸운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런 과도한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발전적일 수 없다. 자기 비하에 몰입하면 할수록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머뭇거리게 되고,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자기 학대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본주의자 또는 내부자로 옅어지거나 아예 페미니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커헤인이 제시한 이 네 가지 유형이 전부인 것도, 남성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이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분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자기 성찰과 이론, 실천을 동시에, 적절한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두려움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타파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개안 직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과 언어, 살아온 과정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태어나 처음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물었다. 나는 자기 학대자였다.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 그 안과 밖의 어려움

나의 경우 이전까지의 나에 대한 재해석과 이로 인한 태생적 한계에 대한 내적 집중은 동시에 외적으로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나의 주변 환경에서의 어려움은 페미니즘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페미니즘을 모르거나 이에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들, 혹은 모르는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성인 친구가 많은 편인데, 이는 페이스북의 이성애자 연애 관련 페이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절대 이성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의 애인이 이성 친구와 자주 놀지 않게 관리하라’는 것이다. 나의 남성 친구들도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것은 ‘이성은 잠재적 연애 대상’이라는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란 잠재적 연애 대상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 관점은 국립국어원도 다르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페미니스트’를 검색해보면, 페미니스트를 “「명사」 「1」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2」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자기성찰의 의도와 그 목적은 여자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여성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이 사람은 게이가 아닐까’하는 소수자 혐오이다. 남자가 여자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게이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인식을 나타낸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소수자 혐오가 결합된 이 무지와 폭력의 끝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바깥에서의 문제라면 페미니즘 안쪽에서의 문제는 결이 다르지만 더 중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하여, 성적 차별에 대하여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와 그것의 부분이자 재생하는 주체로서 나는, 이러한 관성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나의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 경험에 빗대어 자신감 있게 내딛은 것이 내가 가진 권력과 결합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말할 때 ‘이것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남자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다.’,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등과 같이 이것이 남성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동이 결국 남성들의 이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연대할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당신의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그 연대는 어떠한가.

남자가 뱉어내는 페미니즘

고민의 연장으로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남성이 무섭다는, 남성혐오에 걸릴 것 같다고 고백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항해 우리 주변의 남성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죽음과 억울함의 대비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답고자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죽음

몰래 카메라가 있을까 화장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여성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에 떠는 여성

테러를 당할까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 해고되어 재취업되지 않는 경력단절 여성

자신의 꿈을 이루려 일과 육아를 모두 떠안다 과로로 떠난 여성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고된 여성

허락 받지 못한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메갈리아

가임기여서 지도에 표시된 여성

여자라서 죽은 여성

억울함

남자만 군대 가서 억울한 남성

남자만 무거운 것을 들어서 억울한 남성

여자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운전하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자신보다 똑똑한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직장 상사인 것이 싫은 남성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 싫은 남성

성평등주의가 아닌 여성주의라 싫은 남성

‘나도 여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남성

여성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아서 싫은 남성

여성과 남성이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1인 시위하는 남성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닌 계급의 문제라며 조개 무덤을 쌓는 남성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억울한 남성

그리고 이 죽음에 대비한 나의 페미니즘 역사는 남자들의 억울함만큼의 보잘 것 없음을 자랑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이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유는 그저 ‘살아있고자’ 함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비해 불편함과 억울함을 뱉어내듯이 ‘인간’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허겁지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것을 통해 보호하고자 함은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커헤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로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은 비판에 대해 개방적일 것과 지속적으로 자아 성찰을 하라는 것이다. 셋은 남성 활동가들과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한남’과 ‘유니콘’의 사이, 분노와 용서의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방에 앉아 울고만 있지 말자. 칭찬 받으려 하지 말자. 페미니즘으로 치장하지 말자. 분노와 용서 사이의 그 어딘가를 뚫고 나가자. 내가 만난 페미니즘은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 무엇이 옳지 않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한계를 넘기 위해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http://change2020.org/) 에서 이와 관련한 카드뉴스를 미디어오늘에 보내왔습니다. 바꿈은 사회진보의제들에 대한 소통을 강화하고 시민단체들 사이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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