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가시밭길이었다.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극적으로 꺾고 4월말 당 후보가 됐더니 5월 김대중 대통령 두 아들의 비리가 불거져 민주당 지지율이 추락했다. 같은 달 한나라당은 이회창을 후보로 확정짓고 컨벤션 효과를 누렸다.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영남에서 광역단체장을 한 석도 건지지 못하며 참패했다.

같은 달 열린 한일월드컵이 4강에 올랐다는 이유로 대한축구협회장 출신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바람을 탔다. 민주당은 쪼개졌고, 반노무현 세력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정몽준을 지지했다. ‘후보교체론’까지 등장하며 위기에 몰렸지만 11월 말 정몽준과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다시 지지세를 모아갔다. 투표 전날인 12월18일 밤 정몽준은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등 마지막까지 노무현은 안심할 수 없었다.

한 표가 아쉬운 상황에서 노무현 캠프와 지지층들 사이에선 ‘권영길 사표론’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노무현 표를 가져가 노무현 앞길을 막는다는 주장이었다. 이회창 후보에 맞서기 위해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는 주장은 꽤 파괴력이 있었다. 당시 권영길 측이 자체조사한 결과 선거 전 지지율은 6~8% 사이를 오갔다. TV토론 한번 할 때마다 1~2%씩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기존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이 권영길에게 모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당시 언론도 사표심리가 권영길에게 걸림돌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선거 3일전인 12월16일 국민일보는 “양강 구도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제3의 후보에게는 표가 몰리지 않는다”며 “15대 대선에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된다’는 공격에 시달렸다”고 전하며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논리가 먹힐 경우 권 후보는 지지율이 각종 예측보다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분석은 적중했다. 실제 권영길 후보의 득표는 3.9%에 머물렀다. 사표론이 먹혀 실제 득표는 반토막이 났다.

하지만 당시 오마이뉴스는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들을 취재해 권영길의 등장이 특정후보의 유불리를 따지기 어렵다고 결론냈다. 이 매체에 따르면 한길리서치는 권영길 표의 상당수가 노무현에게서 왔다는 가설은 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부동층의 표가 권영길에게 이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상적으로는 권영길의 표가 이회창에게서 온 것으로 보이지만 양쪽 지지자들의 성향이 달라 이것도 설득력이 크다고 볼 수 없다고 분석했다.

오마이뉴스는 “권 후보의 등장이 노 후보를 중도세력의 대표로 자리잡게 만들어 노 후보가 잇점을 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전했다. 권영길의 등장은 실제론 노무현에게 도움이 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후보의 색깔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았다.

15대 대선에서 받은 3.9%는 여전히 대선에서 진보정당이 받은 최고 득표로 기록되고 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오세훈 새누리당 후보에게 0.6%p 차이로 패배하자 3.3%를 득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조사기관들이 10%p 이상 차이로 한명숙이 진다고 전망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승자독식 경쟁은 소수자에게 폭력적이다.

촛불대선에도 등장한 사표론

▲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7일 앞둔 2일 오후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앞 대현문화공원에서 사전투표 독려캠페인 피켓을 들고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7일 앞둔 2일 오후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앞 대현문화공원에서 사전투표 독려캠페인 피켓을 들고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2002년 대선에선 여야가 1:1구도로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실제론 별 효과가 없다는 분석에도 ‘진보정당 사표론’이 정당성을 얻었다. 이번 대선에선 민주당만의 힘으로도 정권교체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 대한 사표론 공격이 나오고 있다.

2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이 “정의당에 대한 지지는 다음 선거에 하셔도 괜찮다”며 “이번에는 정권교체에 집중해주는 게 시대정신에 맞지 않나 호소드린다”고 말했다.

심상정 후보는 이날 유세현장에서 “작은 가게에도 좋은 물건 있으면 불티나게 팔리는 것 아니냐”며 “좋은 물건을 자기 가게에도 들여놓으면 되는데 좋은 물건도 없으면서 작은 가게 가지 말라고 하면 그게 갑질”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점에 대해서는 문재인 후보의 해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종철 정의당 서울시당 공동위원장은 페이스북에 “심 후보는 2012년에도 문재인 후보 지지를 위해 사퇴했음을 상기시켜드린다”며 “이제 표 나올 데가 심상정 지지층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정의당에 대한 견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민석 민주당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 종합상황본부장은 지난달 27일 심 후보 지지율 상승에 대해 “정권 교체 민심이 정권 교체에 차질을 가져올 정도의 선택을 안 하는 최종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심상정의 지지율이 더 올라선 안 된다는 뜻이다. 송영길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은 지난달 20일 심 후보가 문 후보를 검증했다는 이유로 “정의당의 정의가 아닌 듯하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문재인 지지층 뿐 아니라 캠프에서도 적극적으로 진보정당에 표를 줘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지난달 20일 송영길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 소설가 공지영씨의 발언을 리트윗하면서 심상정 후보를 비판했다.
▲ 지난달 20일 송영길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 소설가 공지영씨의 발언을 리트윗하면서 심상정 후보를 비판했다.

이는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인 3일 이후엔 더 거세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최근 상승세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하락세인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거의 따라잡았거나 이미 따라잡았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선거 막판에 심 후보의 큰 장애물이 ‘기존 양자구도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으니 심상정을 지지할 게 아니라 문재인에 몰아줘야 한다’는 ‘강자우선의 논리’다.

홍 후보가 선전할수록 ‘홍준표가 거세게 치고 오니 일단 문재인부터 밀어달라’는 주장이 파급력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1일 홍 후보 캠프 관계자를 허위 여론조사 결과를 조직적으로 유포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홍 후보가 표 결집에 나설 경우 결과적으로 심 후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보수성향 언론에서 심 후보에 주목하는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조선일보 중견기자가 전하는 ‘뉴스를 쪼다’ 코너에서 “심상정 후보는 표를 의식해 자기주장을 후퇴하거나 눈치 보지 않았다”는 등 심 후보를 높이 평가했다. 채널A의 ‘외부자들’에 심 후보의 정책을 조명하거나, 여성조선에서 심 후보 남편 이승배씨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적었던 심 후보 측에선 정책과 강점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해당 언론에서 대체로 심 후보에 대해 합리적으로 다뤘다. 하지만 문 후보 지지층에서는 이미 해당 방송이나 기사 내용보다는 ‘보수성향의 언론에서 띄우는 후보’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

심 후보는 사표론 프레임을 뒤집기 위해 유권자들을 꾸준히 설득해왔다. 심 후보는 “그 동안 될 사람 밀어주고 정권교체 한다고 차선책 밀어주고 그러니 이분들이 자신들이 진짜 잘해서 밀어준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며 “그 결과 수십년동안 차선의 정치만 이뤄졌고 그래서 대통령까지 파면됐다”고 주장했다. 심 후보는 “대세에 편승한 표가 사표”라며 “이번 대선은 심상정-문재인-안철수의 개혁경쟁이니 거침없이 개혁할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율이 안정적으로 10%를 넘었고 일부 조사에선 후보 지지율도 두 자리 수를 기록하자 심상정 캠프는 목표를 두 자릿수 지지에서 15% 이상 득표로 상향조정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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