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환몽’이란 ‘임금을 받는 노동이 신성하며, 임금노동을 열심히 하는 게 미덕’이라는 생각이다. 칼 마르크스의 둘째 사위이자 프랑스 하원의원을 지낸 폴 라파르그는 저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할 권리’가 아닌 ‘게으를 권리’를 주장했다.

라파르그는 이미 150여 년 전에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이런 환상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며 “이런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반세기 이상 장시간 저임금 노동으로 달려온 우리에게 ‘헬조선’은 예견된 일이었다.

노동 중독은 아편이나 알코올 중독과 별 다를 바 없다. 일부는 강요된 여가에 시달린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도덕가들은 노동의 교리를 만들어내 노동을 신성화한다. 권력자들은 동물실험 하듯 이를 대중에게 적용한다. 경영·경제학자들은 이를 지적으로 지지한다.

▲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새물결 펴냄
▲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새물결 펴냄

열심히 일하면 경제가 성장해 모두가 잘 살수 있다는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잉생산은 경기침체를 불러일으킨다. 잘못된 판단을 책임지는 이는 따로 있다. 경제상황에 문제가 생기면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탓한다. 1997년 외환위기 등 경제 실패의 책임은 노숙자나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이 대신 졌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각종 관념의 기원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노동 혐오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였다.” 라파르그는 고대 철학자들이 느꼈던 게 정확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노동이 신성시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가 만든 편견이라는 라파르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더구나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자본가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폭발력을 가졌다고 본다. ‘근로(勤勞, 부지런히 일함)’를 강조하는 이들은 보통 노예를 부리는 자들과 그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노예들이다.

부르주아들이 인권을 외치며 프랑스 혁명으로 얻은 건 ‘하루 16시간 노동’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노동시간이 줄어들 것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측은 맞지 않았다. 자본은 실업자를 일정수준으로 유지시켰고, 실업자들이 많아질수록 자본의 압도적인 힘은 유지됐다.

“또 프랑스의 공포 시대에 활약한 영웅들의 후손들이, 노동이라는 종교(the religion of work) 때문에 너무나 타락해, 1848년 혁명으로 적지를 정복하고도 공장 노동을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수용했음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일할 권리’를 혁명적 원리로 선언했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여,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오직 노예들만이 그처럼 비열한 짓을 하려들 것이다.”

한쪽에선 과로로 고생하고 다른 한쪽에선 실업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장점을 찾는다. 노동은 대중에게 유일한 삶이다. 회사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노동자들이 주인처럼 일한다. 노예가 주인의식을 가질 때 맹목이 시작된다. 노동은 계약에서 종교로 변했다. 스스로 통제하고 채찍질하는 사회다. 노동자와 예비노동자에겐 여유가 없다.

▲ 사진=pixabay
▲ 사진=pixabay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여유가 없을 때 비판의식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파고든다. “소복하게 세상 만사를 있는 그대로 굳게 믿는 성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은 세뇌받고, 성급한 노동자 계급은 아무 생각없이 노동과 금욕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나태함, 강제적인 향유, 비생산, 과소비를 평생 동안 누릴 수 있게 됐다.”

‘노오력’이 배신했다. 열심히 자기계발 했지만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배불러가는 자들이 따로 있고, 함부로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 과로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을 없앤다. 악순환이다. 임금노동에 파묻혀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임금노동 바깥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달리는 열차의 브레이크를 당길 때다.

저자 라파르그는 레싱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제안한다. “모든 일에 게을러지자. 사랑하고, 술을 마시고, 게으름 부리는 것만 빼고.”

라파르그는 기독교 윤리, 경제 윤리와 자유사상가들의 윤리에 깔린 온갖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저자 버트런트 러셀은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한다. 기술 발전은 노동시간 감소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 개발된 온갖 기술은 시공간을 초월해 노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뿐이다. 기술은 자본을 위해 쓰인다. 최근 화두인 4차산업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한 대선주자의 외침을 부여잡을 필요가 있다. “공약에 기술과 산업만 있지, 사람이 없다.”

▲ 폴 라파르그.
▲ 폴 라파르그.

오늘날 노동에는 인간이 빠져있다. 노동은 비용이고 수단이다. 노동절은 이런 노동을 신성하다고 찬양하는 날이 아니다. 노동을 담당한 사람들의 행복을 살피는 날이다. 더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하던 걸 잠시 멈추는 날이다. 노동으로 놓친 게 없는지 점검할 날이다. 노동할 권리보다 더 중요한 건 게으를 권리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극작가 아미리 바라카는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대해 어느 쪽이 더 빛나는지 더 무거운지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게으름이 무기력하게 쳐져있는 시간이라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게 라파르그의 생각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게으름 속에서 행복할 가능성이 생긴다. “바라건대,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더 나은 사회는 더 열심히 일한다고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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