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광화문 네거리를 밝혔던 빛은 그 어떤 전열기구도 아닌 촛불이었다. 차디찬 추위 속 광화문광장을 덮었던 온기는 서로에게 향했던 1500만의 체온이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19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일상으로 돌아간 촛불은 이야기하고 있다. 장미대선, 촛불대선이라는 이름아래 집권하게 될 차기정부의 몫은 사회전반에 축적된 적폐청산을 자기과제로 떠안는 것이라고. 광화문에 울려 퍼졌던 ‘이게 나라냐’,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외침은 이 사회에 살아가는 다수의 삶이 무너졌음의 증거였다. 경제순위가 세계10위 안 밖에 위치하고 있지만 심화된 불평등, 소수만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다수의 절규였다. 일을 해도 가난한 사회, 자살공화국이라는 말에 어색함 없는 사회, 적폐청산의 시작은 다름아닌 불평등과 빈곤을 해결하고 무너지고 내몰린 다수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은 19대 대선에서 장애등급제, 장애인수용시설 그리고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최인기 제공
▲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은 19대 대선에서 장애등급제, 장애인수용시설 그리고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최인기 제공

2012년 8월21일,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외치며 시작된 광화문역 지하도농성이 어느덧 1700일을 넘어 5년을 향해가고 있다. 농성장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가 만들어야 할 사회는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3대 적폐, ‘장애등급제’, ‘장애인 수용시설’, 그리고 ‘부양의무제’를 기필코 폐지해야 한다고.

빈곤문제 1호 과제

2011년에서 2014년까지 4년 간, 3가구 중 1가구가 빈곤을 경험했다. 한국사회 빈곤율은 약 14%로 OECD국가 중 2위를, 그 중에서도 노인 빈곤율은 50%에 육박하며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에게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 한국사회 마지막안전망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1조 목적에 쓰인 문구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목적에 부합하게만 운영되고 있다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저생활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다면, 우리사회가 이런 수치스러운 수치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본인이 가난한 것과 동시에 부양의무자 역시 가난해야 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정하고 있는 부양의무자는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이며,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이 국가에서 정해놓은 기준 이상일 때 수급비를 삭감하거나 수급권을 빼앗아간다. 이때 수급비 삭감이나 수급권 박탈은 실제 부양여부와 상관없이 강제 진행된다. 부양의무제는 생활이 어렵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로부터 최저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방치하고 있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2012년 7월 거제에 살던 이씨 할머니는 사위의 소득증가로, 부양의무제 때문에 수급에서 탈락됐다. 분노한 할머니는 시청에 항의하며 ‘법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등졌다. 이것은 이씨 할머니의 이야기면서 가족을 두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많은 가난한 이들이 부양의무제 때문에 사회에서 가려지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 2012년 8월21일 부양의무제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는 서울 광화문역 지하도 농성이 1700일을 넘어 5년을 향해가고 있다. 사진=빈곤사회연대
▲ 2012년 8월21일 부양의무제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는 서울 광화문역 지하도 농성이 1700일을 넘어 5년을 향해가고 있다. 사진=빈곤사회연대

어떤 부양의무제를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

19대 대선에 나온 대부분의 후보들이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다. 광화문농성장을 중심으로 한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지난했던 투쟁한 결실이며, 불평등과 빈곤을 해결하라는 촛불의 염원,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이제는 ‘어떤’ 부양의무제를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대선후보들의 선언과 함께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한 다양한 방식들이 논의되고 있다. 누구는 폐지의 효과를 내기위한 ‘완화’의 방식을 또 누군가는 노인·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폐지를.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부양의무제 폐지가 아니다. 광화문농성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부양의무제 폐지는 어떤 다른 것 아닌 ‘전면 폐지’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시행 이후 부양의무자의 범위와 소득기준에서 몇 번의 완화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사각지대 해소에 효과 없었음은 100만이 넘는 사각지대,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 알려주고 있으며,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보고서에서 조차 ‘폐지가 아닌 완화의 방식으로는 사각지대 해소효과가 미비할 것’이라는 결과를 낸 바 있다. 효과를 내기 위한 ‘완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빈곤해결에 ‘의지 없음’과 다르지 않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이전 생활보호법과의 차이점 중 하나는 인구학적 기준을 폐지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같은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부터 개인과 주변에 영향을 주는 질병이나 실업 등의 위험에까지,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 가난에 처한 누구에게나 최저생활에 필요한 급여를 보장해야 한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우선 폐지하는 것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이전의 생활보호법으로 회귀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빈곤사회연대
▲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빈곤사회연대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다시 ‘누가 가장 취약한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것은 또 다른 불평등을 조장하며 제도의 권리성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부양의무제 때문에 수급권을 박탈당하는 사각지대는 본인의 소득과 재산은 빈곤선 이하로 선정기준을 충족하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가장 취약한 사각지대다. 상대적으로 덜 긴급한 가난이라는 폭력은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가난 때문에 죽음을 결심하는 사회를 멈추자. 우리 누군가 가난에 처했을 때 사회가 가는 도울 것이라는 확신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양의무제는 전면 폐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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