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작년 10월 26일, CJ E&M에 재직 중이던 신입 조연출 이한빛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긴 유서의 일부다. 이씨의 죽음은 장시간 고강도 노동과 군대식 조직문화가 청년 노동자의 삶의 의지를 박탈한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지난해 8월27일부터 마지막 촬영일인 10월21일까지 55일 동안 이씨가 쉰 날은 이틀에 불과했다. 촬영기간 동안 휴대전화 발신통화 건수는 1547건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CJ E&M은 미온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며 고인의 근무태도 불량과 팀 내 불화 등 개인의 책임만 강조해 왔다. 

▲ 고 이한빛PD의 동생 이한솔씨와 어머니 김혜영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고 이한빛PD의 동생 이한솔씨와 어머니 김혜영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한빛 PD, 55일 동안 단 이틀만 쉬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CJ E&M의 책임과 드라마 제작환경의 문제점을 넘어서는 접근이 필요하다. 비극은 방송사와 프로그램 장르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2002년 KBS 파견계약직 조연출이 제작현장에서 과로사했고 2008년 SBS 시사보도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던 막내작가는 과중한 업무 부담 끝에 새벽에 방송사 옥상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자본은 방송사와 장르를 막론하고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을 통해 노동자들을 단기계약 비정규직, 외주 프리랜서 등으로 외부화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내부화한다. 이런 방송콘텐츠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와 유명 연예인들의 출연. 그렇게 방송콘텐츠는 화려한 영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방송콘텐츠를 제작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과정은 시선 밖에 은폐되어 있다. 방송콘텐츠제작은 크게 자체제작과 외주제작으로 나눌 수 있다. 1991년부터 시행된 외주정책에 의해 방송사들은 일정 비율 이상을 외주제작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한다. 

51.8%, 2015년 기준으로 지상파방송사에서 외주제작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그렇다고 외주제작사가 온전한 권한을 가지는 건 아니다. 방송사는 일부를 제작하며 외주제작의 과정을 관리한다. 형식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방송사에 의해 지휘·명령이 관철되는 것이다. 즉 방송사는 ‘본사’다.

▲ ⓒ iStock.
▲ ⓒ iStock.
비극은 방송사와 프로그램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다음은 노동력의 분리다. 방송콘텐츠를 제작하는 노동력은 자체제작·외주제작을 불문하고 철저한 ‘이중노동시장’의 특성을 띠고 있다. 정규직은 방송사 내부에 존재하면서 일반적으로 근속년수에 따라 처우도 나아지지만 방송사 내·외부의 비정규직은 방송사 내부로의 이동이 철저하게 차단된다. 

비정규직은 주로 프리랜서와 용역 및 파견업체를 통해 충원하고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인턴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장비대여업체와 조명, 음향 등 부문별 협력업체 노동력이 결합한다. 외주제작의 경우 콘텐츠 제작뿐 아니라 방송사의 용역업체 역할도 한다. 외주제작사에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된 프리랜서가 방송사에 종속돼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방송콘텐츠제작현장에는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을까? 2011년 SBS ‘뿌리깊은 나무’ 제작스태프 구성을 들여다보자. 크레딧 분석을 통해 연출, 촬영, 조명, 장비, 미술, 음악/음향, 후반작업 등으로 구분하였을 때, SBS 본사 정규직이 담당하고 있는 것은 연출 정도다. 넓은 범위의 연출 직무에서도 조연출, FD 등은 대부분 프리랜서가 담당하고 있다. 

미술(의상, 분장, 미용, 컴퓨터 그래픽)과 촬영, 후반작업 등을 SBS 자회사가 담당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다수는 비정규직이 담당하고 나머지 조명, 장비, 음악/음향 등은 외주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다. 일부 교양·보도 장르를 제외하면, 방송콘텐츠제작현장의 80~90% 이상은 외부 노동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이유로 방송사 외부 노동자들의 정확한 규모는 짐작조차 어렵다. 방송콘텐츠산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상파방송사와 케이블채널사(방송채널사용사업자), 방송영상독립제작사의 노동시장의 규모는 2015년 현재 36,830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전체 콘텐츠산업 노동인력의 5.9%에 불과하고 이들이 전체 콘텐츠사업의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4%다. 

▲ KBS비정규직노조가 2013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임금인상과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총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 KBS비정규직노조가 2013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임금인상과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총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방송콘텐츠제작현장 비정규직, 규모 추산도 어려워 

하지만 이를 적은 인력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들과 일하는 노동자 다수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 통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방송작가만 해도 대략 1만 명은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통계 밖의 비공식적 노동자가 수 만 명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방송사 내부 정규직과 달리 방송사 외부 노동자들은 주로 대학의 방송 관련 학과, 사설 아카데미, 기획사 등을 통해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프리랜서 계약형태로 ‘평생’ 일하게 된다. 계약체결도 근로계약이 아닌 프로그램별 계약방식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구두 계약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계약기간 내 일방적 계약해지(실질적 해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럴 경우 보수가 문제가 된다. 프로그램별 계약이다 보니 제작 및 방영 취소 시에는 한 푼도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보수 자체도 적다. 신입 노동자들의 월 평균 보수는 10여 년째 100만원 남짓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4대 보험조차 제대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상해 사고가 벌어져도 노동자가 개인의 비용으로 감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고용불안에 ‘열정페이’는 기본이고, 사회안전망에서조차 배제되어 있는 셈이다. 대체 왜 방송사 외부의 노동자들이 방송콘텐츠를 만들고 있고, 이들의 노동환경은 이토록 열악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방송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변동과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산업과 노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동조건은 산업의 구조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2회에서는 방송이 자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산업구조의 확장과 자본 간 경쟁을 통해 어떻게 노동이 분절되고 유연화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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