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니 사실 태어날 때부터 내 존재와 생명을 위협하는 젠더폭력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남존여비 가정에서 태어났고 여아낙태 위험과 부계폭력에 처해 변변찮은 도움구할 곳 하나 없이 버텨왔다. 5살적에는 납치와 강간미수, 8살 때는 바지와 속옷을 벗고 발기된 성기로 쫒아오던 아저씨도 있었다. 당구채로 어떤 날은 듀오백 의자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아버지의 가부장적 참교육을 버텨내던 날들, 아버지의 자해로 선혈이 낭자하던 내 방 침대. 이별 통보에 염산을 들고 숨어있겠다던 전 남자친구 그리고 한강 투신 협박.

어둡고 지독한 이야기, 토해내는 처절한 언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정적인 경험들로 내 삶의 역사는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스스로를 미친 듯이 분리하고 싶었다. 유쾌하지 않은 ‘비정상적’ 삶에서 탈출하여 유쾌한 나만의 '정상'범주를 꾸리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 피해경험은 사소한 것, 잊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야 나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전까지 나의 피해경험은 내가 지독하게 운이 나빠서 우연하고도 특이하게 겪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슷한 경험들, 그로인해 삶을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착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의 역사였지만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들이 아니었다. 강남역 사건이 터지고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며 두려움과 분노에 눈물을 훔치며 모이는 여성들은 그들 자체로 젠더피해의 산증인들이었다. 그 삶의 경험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그 심정으로 거리에 나온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처를 위로하며 곧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발화하기를 막 시작했다. 강남역 사건이 페미니즘 계보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 시대 여성들이 발언하기를 시작했다는 것. 그동안 삶에서 겪어온 젠더피해에 대해 우리는 묵인 “당했다.” 가해자는 자연적인 본능을 억눌러야하는 현자가 단순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되는데 반해 피해자는 상황에 있어 조금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되는 완전무결한 순결성을 지녀야만 비로소 시혜적인 피해자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왜 여성의 피해사실과 그로인한 사회적 약자성을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가? 왜 이 사회에서 젠더피해를 말하는 것은 유별나고 예민한 것이 되는가? 여성이기 때문에 거쳐야했던 이 지독한 일상이 많은 누군가들에게는 고백이 되고 충격이 되고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균열이 되고 불쾌함이 된다. 과소산정 된 피해의 통계치는 그 숫자마저 지워지기 일쑤지만 그 단순 산정되는 숫자 너머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존재한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남성과 공존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생각하고 발화할 수 없었던 서로의 젠더폭력 피해경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해경험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피해자에 대한 스스로의 코르셋을 벗고 행동할 수 있었다.

코르셋에 가둔 ‘약자의 권력’

앞서 말했듯 약자의 권리는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젠더사회 억압의 유지를 원하는 남성사회는 여성의 피해경험을 쉽게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피해경험을 무시하고 피해경험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의 인지 자체를 못하도록 교란시킨다. 무력하고 나약한 약자의 이미지를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자성해야 하는 젠더 가해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한다.

1.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

‘몸가짐, 조신함’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순결함은 모두 성범죄 피해자에게 “원인제공자”의 낙인을 찍어 폭력의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성범죄 가해자에게 가해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덜어내는 가해자중심 정서이다. 애초에 젠더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완전무결한 기준에 합당하는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순결함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장치일 뿐이다. (*꽃뱀논리가 대표적인데, 성범죄의 무고죄 판결이 여타의 다른 범죄와 유사한 2% 수준에 그침에도 젠더폭력의 피해자성을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귀결하는 정서에 성범죄 피해자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폭력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검열하기에 이른다. 목소리를 내어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는 사회의 부당한 시선과 프레이밍에 차선의 자기방어라도 하기 위해 피해사실 자체를 묵인한다. 밝혀지지 못한 폭력이 주변 곳곳에 산재해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순결함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서는 결국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여성들 스스로 예방하고 방어하라는 것이 된다. 흉흉히 들려오는 범죄소식에 젠더약자들은 서로를 조심하자며 밤늦게 다니지 말자며 다독일 뿐이다. 심지어는 남성 애인들의 “어떤 옷을 입지 말라”, “어떤 화장을 해라”하는 말들. 폭력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와 피해자의 옷차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강간의지 그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성범죄는 근절해야할 것이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는 것인가? 잠재적 범죄자는 없다는데 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되어 범죄의 책무를 발생도 전에 부담하고 있는가. 공공연한 젠더폭력과 피해경험은 가히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잠재적 피해자도 아닌 엄연한 젠더 피해자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된다.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은 모든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대상임을, 갈취될 수 있는 대상(물건)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공론을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내면화하기 쉽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스스로 현실적인 코르셋을 인지하지 못하고 판단력을 잃게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담론에 휘둘리게 된다.

2. 순결한 모성애 코르셋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딸로 태어나 남성의 아내로 가정의 어머니로 만들어진다. 가부장사회의 생애주기를 거쳐 만들어진 모성애는 여성의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미혼 여성은 개인의 꿈, 욕망, 정체성과 상관없이 신체적인 특징을 꼬집혀 ‘가임기 여성’으로 몰살당한다.

남성사회는 여성이라면 꼭 수행해야 마땅한 역할이라며, 철저히 무시하고 혐오하면서도 돌봄 노동을 강요한다. 여성의 노동을 아주 저렴하게 착취한다. 만들어진 모성애로 세뇌된 우리의 어머니들은 스스로가 착취를 당하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존재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돌봄 노동은 반드시 필요로 되는 존엄한 노동이다. 근대화의 과실이 자유시장의 범주에 있었던 남성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탄생과 죽음까지에 여성 돌봄 노동의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분담은 유한한 인간 존재를 위해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폭력적인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서도 분담되어야 할 의무이다.

주변에도 미혼모는 넘쳐나지만 미혼부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도, 미혼부모가 되었을 때의 어떤 방침과 제대로 된 지원제도도 없는 사회에서 덜컥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간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하는 소송 자체가 많지 않은 것은 아이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을 모성애라는 미명하에 여성이 조용히 떠안기 때문이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모성애의 양심으로 지워버린다. 양육비를 요구해도 대부분의 미혼부가 지급할 경제력이 없는 것이 실상이긴 하나 많은 미혼모가 최저임금의 벌이로 지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나간다. 신체적 순결함에 위배된다는 미혼모에 대한 징벌적 시선을 모성애의 부담과 함께 떠안는다.

3. 친절한 페미니스트 코르셋

페미니즘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참으로도 다채로운 혐오와 코르셋이 펼쳐졌다. 페미니즘을 뜨거운 감자로 만든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문제되어 왔던 유리천장이나 성범죄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고 믿었던 남성들의 인식을 재확인한 충격이 컸다. 분노하고 좌절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친절함, 피해경험에 대한 상처를 부정당한 경험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 자기혐오가 이어졌다. 젠더폭력의 현실에는 그저 안주하던 자들이 내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하자 나의 태도를 뒷짐을 지고 지적하며 나의 생각과 언어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언젠가 나는 평화를 말했고 또 언젠가 나는 계급 갈등도 지적했다. 그들과 희망을 가지고 공유했던 담론들이 페미니즘 앞에서 모두 무너졌다. 그들도 나의 입장에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지만(사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 대부분이라 짐작한다) 나로서는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오랜 친구들과도 결별했다. 지독한 스토킹으로 힘들었던 시절(그 스토킹은 6년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줬던 고마운 친구들인데, 친구들의 혐오발언을 견디지 못해 내가 스스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인연이 애석하지만 내가 미안할 것이 없듯 그들도 페미니즘을 알지 않고서야 영원히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정상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페미니즘)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어떤 친구들은 당장의 부계폭력에 처한 내게 무턱대고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자는 이 글도 그들에게는 피해의식에, 망상에 찬 과격한 글이라고 읽힐 것 같다. 그들에게는 없는 피해가 내게는 있으니 구분되는 의식이 내게 투철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입맛에 맞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새로 만나서 기쁘다는 위안은 하지 않겠다. 차별주의자일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 마음 아픈 인간관계의 결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도 나의 페미니즘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4. 남성성 코르셋

만들어진 여성성의 코르셋은 아주 정교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나의 경험과 언어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공부하면서도 나의 무의식적인 코르셋과 남성성에 여전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는 자아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처럼 남성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성에 대한 트라우마는 나의 페미니즘 언어를 흐리게 하고 자꾸만 판단을 교란시키려고 한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해체해야 할 나의 마지막 코르셋은 바로 이 공포심일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여성은 여느 남성과 같은 인간임에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성으로 규정되고 착취당하며 폭력에 처해 진다. 피해자의 발화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의 '정상'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끝없는 자기검열을 한다. 여성성의 '비정상'을 느끼고 자기혐오를 떨쳐내야 한다. 착취가 공공연하여 정당화되는 구조에서 독자적인 존재인 나를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더럽혀진’, ‘발랑까진’ 피해자는 없다. 젠더피해를 밝히고 마땅히 권리를 찾아야할 약자성에 무력하고 나약한, 완벽한 순결성을 요구하는 시선은 약자성을 젠더권력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시혜적 약자성일 뿐이다. 약자성은 여성의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지 가해자인 기득남성이 인정하느냐 마느냐 검증할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시혜적 약자성은 근본적으로 약자성의 지속을 고질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억압이 깃들어 있으며 여성들의 권리 찾기를 교란시킨다. 우리의 피해경험을 지우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시혜적 약자성에서 떨쳐나 스스로의 권리를, 약자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http://change2020.org/) 에서 이와 관련한 카드뉴스를 미디어오늘에 보내왔습니다. 바꿈은 사회진보의제들에 대한 소통을 강화하고 시민단체들 사이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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