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한번 해보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2년 전 펴낸 자전적 에세이에서 대학생 시절 성폭력 범죄를 모의했다는 내용이 뒤늦게 알려졌다. 만약 그랬다면 언론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이른바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후보 사퇴 요구가 빗발쳤을 것이다. 보수언론만이 아니라 대다수 언론이 대통령 후보의 자격과 품성을 언급하며 후보사퇴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언론의 이런 태도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보수·진보 성향과 상관없이 ‘자격 미달’ 후보에 대한 사퇴 요구는 언론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범죄 모의는 이념이나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기본적인 윤리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런 범죄를 모의하고 여기에 가담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는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 ‘그’가 문재인 후보든, 안철수 후보든, 홍준표 후보든, 유승민 후보든 이런 범죄 모의에 가담했다면 대선 후보 사퇴는 물론 정계를 은퇴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선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하숙집 룸메이트와 돼지 흥분제로 성범죄를 모의, 실행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뒤늦게 알려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후보 사퇴는 고사하고 버젓이 TV토론까지 등장해 한국 사회 비전 등을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의 일부분
▲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의 일부분
‘5·9대선’을 불과 2주 정도 남겨둔 지금, 성범죄를 집단으로 모의했던 자가 공당의 대선 후보 자격으로 국민 앞에 나선 것도 어이없지만 그가 끊임없이 상대 후보를 향해 색깔론 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후보 자격이 없는 자가 대선 경쟁에 뛰어들어 대선판 자체를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차 TV토론에서 다른 후보들이 “성폭력 범죄를 공모한 후보를 경쟁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며 그를 대선 후보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홍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일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홍준표 후보의 안하무인식 태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성범죄 모의’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와 자유한국당이 보인 반응이다. 자유한국당은 “20살 혈기왕성한 나이에 있었던 일인 만큼 국민들이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홍 후보는 더 가관이다. “이미 자서전에서 사죄했으니 됐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넘어가려 하고 있다.

냉정히 말하면 상황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언론 책임이 크다. 이미 ‘범죄 모의’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 상황인데도 상당수 언론은 홍준표 후보에게 직접적인 사퇴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 사퇴 요구는커녕 관련 사안도 소극적으로 보도하는 모양새다. 정의당과 국민의당 논평 중심으로 기사를 내보내거나 다른 후보들이 홍 후보를 비판하는 것을 인용 보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성폭력 범죄를 모의한’ 사람이 대선 후보로 나와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15개 여성·노동·시민 사회단체들이 25일 “‘혈기왕성한 때’에는 강간모의를 해도 봐줄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성폭력에 대한 저열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홍 후보 사퇴를 요구하지 않는 언론은 이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4월25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일산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JTBC(중앙일보·한국정치학회 공동 주관) 주최로 열린 ‘2017 19대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4월25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일산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JTBC(중앙일보·한국정치학회 공동 주관) 주최로 열린 ‘2017 19대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언론은 특정 후보에 대한 편향성을 두고 계속해서 도마에 올랐다. ‘2017 대선미디어감시연대’가 지난 19일 발표한 대선보도 중간평가 토론회 보고서에서도 이 같은 점은 확인된다. 대선미디어감시연대가 최근 한 달 동안 언론 보도를 분석한 결과 더불어민주당에 불리한 보도가 국민의당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물론 이 조사만을 근거로 언론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불리하게 보도하고 있다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에도 반성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자유한국당이 ‘성범죄 모의’를 한 전력이 있는 대선 후보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도 언론 반응은 미지근하다. 문재인 후보였다고 해도 언론이 이런 식의 태도를 보였겠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사안은 정치성향과 정파와는 상관없는 우리 사회의 자존심과도 연관돼 있는 문제다. 언론은 홍준표 후보에게 지금이라도 사퇴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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