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속행되고 있는 '이재용 재판'은 전·현직 고위공직자, 언론인, 전문가 등 정경유착에 연루된 지식인들의 초라한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삼성 총수 일가의 이익'을 공익의 자리에 대치시켜 삼성그룹의 내부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검은 이 과정을 삼성의 '밀착형 로비'라고 불렀다.

특검 수사 결과를 종합하면 삼성그룹의 로비창구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현재 해체)의 조직적 대응에 따라 만들어졌다. 미전실은 '대관업무(입법·사법·행정부 대응 업무)'를 총괄하며 유관 기관 퇴직 공무원 등을 계열사 임원으로 인선해 정보를 보고받았다. 미전실은 이건희 회장으로 대변되는 총수 일가를 보좌하며 총수 일가 지배권 강화, 계열사 현안 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삼성의 전직 고위공무원 활용… ‘사기업 탈법’ 편드는 전직 관료

감사원 감찰국장 출신인 박이명 전 삼성증권 고문이 대표적이다. 박 고문은 메르스 초동 대처 부실로 삼성서울병원이 여론의 뭇매에 시달리던 2015년 중후반경 삼성과 감사원 간 '가교역할'을 했다고 지목됐다. 특검은 지난 20일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5회 공판에서 박 전 고문과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간의 문자메시지 및 진술서를 공개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4월2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등 6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4월2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등 6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박 전 고문은 특검 조사에서 "미전실은 현안이 있을 때 TF를 만들어 대응하는데 필요할 경우 각 계열사 고문을 구성해 대응한다. (메르스 사태 시) 감사원 관련 업무만 내가 투입돼 일을 처리한 식"이라며 "장충기 사장이 현안에 대해 알아봐달라 하거나 삼성 입장을 전달해 달라했고, 내용과 입장을 감사원에 전달하고 그 결과를 장 사장에게 문자나 전화로 결과 보고한다"고 진술했다.

박 전 고문은 이 시기 장 전 사장에게 "어제 저녁 감사원 사회복지 감사국장을 만났더니 BH(청와대)에서 전염성 질환 관리 실태 감사 요구가 있어, 메르스 사태가 진정된 후 보건복지부가 삼성의료원 등에 대한 감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능한 감사시기를 늦춰 착수 전 미리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후에도 박 전 고문은 "메르스 감사건은 현재까지 감사원에서 특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감사위원회가 끝났는데 삼성 관련한 예상 문제점 8건 중 7건은 처분 요구없이 종결됐고, '14번 환자' 접촉 보고 지연 문제만 전염병 예방법 위반으로 조치하도록 의결됐다" 등의 동향을 장 전 사장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주요 감독기관 고위직 인사가 끝난 후 박 전 고문은 신임 금융감독원장 및 수석부원장·증권담당 부원장, 금융위원회 위원장 및 부위원장, 감사원 1차장 및 감사위원 등과 순차적으로 식사 약속을 잡았다. 당시 박 전 고문은 이들에게 협조를 청탁할 요량으로 장 전 사장에게 "새로나온 갤럭시 전화기 6대 지원해주시면 유용히 사용하겠다"는 요구도 했다. 장 전 사장은 이에 기기를 지급했다.

박 전 고문은 현재 삼성그룹 내 존재하는 다수 전직 고위공직자 중 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검 조사에서 "장충기 사장은 대관업무를 수십 년 간 해왔던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삼성그룹 대관업무 총책임자로 알고 있다"며 "장 사장은 정부기관의 고위직 공무원은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관업무'에 대해 "그룹 경영과 관련해 유관 부처가 조사하거나 주재하는 일이 있는 경우, 삼성 입장·각 계열사 입장을 파악하고 정리해서 각 부처에 의견을 전달해 해당 안건에 대해 삼성입장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업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를 상대해야 할 땐 기획재정부 국장 출신 임원이 동원됐다. 기재부 출신 이승재 미전실 전무는 특검에 “금융위 대관업무를 맡았다”고 밝혔고 2016년 1월 중순까지 ‘삼성생명 금융지주회사 전환계획’을 금융위와 논의했다. 이 계획은 ‘논란의 여지가 크다’는 판단에 금융위가 최종 불승인한 안이다.

특검은 이를 '밀착형 로비', '깨알같은 로비'라고 불렀다. 삼성그룹 측 변호인단은 "박 고문이 이수형 전 미전실 팀장에게 메르스 관련해 조언을 해준 것"이라며 "감사원 감찰국장 출신으로 삼성증권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삼성서울병원이 처음 감사를 받으니 도움을 준 것"이라고 반박했다.

‘삼성에 달콤한 말’ 사회에 뿌리는 학자와 언론인

삼성그룹과 청와대 사이 중간지대엔 학계, 언론계 등의 여론 주도층이 있다. 삼성그룹에 유리한 의제를 설정하면서 우호적인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특검 측 문지석 검사는 이를 ‘쿠션치는 작업’이라 불렀다.

▲ 2016년 11월24일 정의당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앞에서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 주범 전경련 해체, 이재용 구속' 기자회견을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6년 11월24일 정의당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앞에서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 주범 전경련 해체, 이재용 구속' 기자회견을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대표적인 예가 전국경제인연합회다. 전경련은 각종 포럼·세미나를 개최하거나 보고서를 발간하고 이를 보도와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여론형성에 영향력을 끼쳤다. ‘미전실→전국경제인연합회→학자·언론인 등 전문가’ 연결고리는 2015년 삼성의 가장 중대한 현안이었던 삼성물산 합병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015년 7월9일 전경련은 30대 그룹 사장단을 모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30대 그룹 사장단은 “지난해 30대 그룹 매출이 사상 최초로 감소하는 심각한 위기 속에서 경제민주화의 표적이 되거나, 반기업 정서를 등에 업은 해외자본의 공격을 받거나, 장기간 수사나 경영자 부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성명서를 냈다. 이들 발언은 다수 경제지와 종합일간지에 보도됐다.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가 삼성물산 합병안 찬성 입장을 정하기 하루 전이었다.

동아일보는 7월 8~9일 이틀에 걸쳐 ‘경영권 방패 없는 한국기업’ 심층 기획기사 7꼭지를 보도했다.

이승철 부회장은 9일 장 전 사장에게 문자메시지로 “오늘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포이즌 필’ 등 방어권 제도 도입을 강조했다. 국민연금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면서 “기획기사, 동아를 출발로 본격적으로 방어권 제도 개선 얘기를 해 나갈 예정”이라고 적었다. 전경련 주도의 언론작업이 삼성 미전실에 보고된 정황이다.

이즈음 학자들은 특별토론회를 열었다. 한국선진화포럼과 바른사회시민회의가 7월14일에 개최한 '경영권 방어와 기업지배구조 논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이름의 토론회다. 외국인 투자자 공세에 대비한 대기업 경영권 보호 제도의 필요성을 다뤘다. 손병두 한국선진화포럼 고문,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윤창현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위원장 등 학자들이 주도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최종 결정될 임시 주주총회를 3일 앞둔 때였다.

이즈음 손병두 고문은 장 전 사장에게 “엘리엇 때문에 얼마나 노고가 크냐. 한국선진화포럼과 바른사회시민회의가 공동으로 다음주 화요일에 간단한 세미나와 기자회견 가질 것”이라는 문자를 전송했다.

특검은 금융감독원의 보고서 발간에도 의혹을 제기했다. 2015년 5~7월 금융감독원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 및 '외국 투자자본으로부터 경영권 방어 제도' 관련 보고서를 집중적으로 작성한 것을 특정한 것이다. 이 시기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때로, 6월4일엔 삼성물산 대주주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합병안 반대를 공식 표명했다.

금감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 전망 및 시사점', '주요국 M&A 방어수단 도입 현황', '엘리엇 사태로 본 향후 제도 개선 및 감독방안', '삼성물산 주식매수청구가격 조정 판결 과정보고서' 등 관련 보고서 7건을 작성했다. 대부분 문건이 청와대에 송부됐거나 청와대 측 요청으로 작성됐다.

특검은 "중앙정부기관에서 삼성이슈를 청와대에 보고하기도 하고,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에서 청와대에 파견된 인사가 관련 보고서를 요구하기도 한다“면서 "엘리엇 사태로 경영권 방어 이슈가 나오고 있었다. 중앙정부기관과 청와대 간 (청탁) 경로”라고 분석했다.

1차 로비 실패하면 청와대·대통령 등판?

특검은 삼성그룹과 행정부 간 유착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앞서 언급된 유착 사례는 가장 낮은 단계인 삼성 계열사와 중앙정부기관 간 유착이다. 이들 사이에서 민원 해결이 되지 않을 시 ‘미전실-청와대’ 단계로 올라간다. 특검은 여기서도 해결이 안되는 현안은 ‘이재용(총수)-대통령’ 간 청탁이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특검은 학계, 언론계 등 여론 주도층은 ‘정경’ 사이를 메꿔주는 촉매제 역할로 본다.

▲ 박영수 특검
▲ 박영수 특검

실제로 ‘중앙정부기관’에서 해결되지 않은 민원은 안종범 전 정책수석 업무수첩에 적혀 있었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지시사항을 손바닥 크기의 업무수첩에 꼼꼼히 기록해왔다.

안 수석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단독 면담했던 2016년 2월15일 업무수첩에 ‘금융지주회사, 금산분리, 외국인 투자기업 세제혜택, 싱가폴 아일랜드, 글로벌 제약회사 유치, 환경규제’ 등을 기재했다. 모두 삼성그룹의 현안과 관련된 사항이다.

삼성은 그해 1월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감독 당국인 금융위에 사전검토를 요청한 바 있다. 금융위는 2월14일 삼성에 계획을 승인할 수 없다고 구두로 전달했고, 바로 다음 날 안 전 수석 수첩에 해당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복병이었던 엘리엇 매니지먼트 관련 지시 정황도 있다. 안 전 수석 수첩 2015년 7월27일 자엔 ‘삼성 엘리엇 대책’이 적혀 있다. 이틀 전인 7월25일엔 이 부회장과 대통령의 독대가 있었다.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 대주주로 합병 반대 결정을 해 삼성 측의 ‘복병’이었다. 당시 삼성은 전경련 회의 등에서 외국계 헤지펀드 등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를 주장해왔다.

2016년 3월18일부터 4월11일까지 지시사항이 기록된 수첩엔 ‘삼성, 양○○ X, 국민연금 의결권위원회 교체 한대 김성민’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성민 한양대 교수는 2015년 삼성물산 합병 추진 당시 의결권행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합병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삼성그룹 미전실은 손아무개 매일경제 편집국장, 원종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을 동원해 김 교수에 대한 설득 작업을 펼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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