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종북주의자’라고 하면 그렇다고 할 겁니까?”(권병길씨 발언 중)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지원배제명단)’ 관련해 일부 장차관급 고위공무원만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문화예술인 512명이 “블랙리스트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연출·평론가, 작가, 연극인 등 512명과 극단·다원예술그룹·예술 유관 협회 등 108개 문화예술단체는 18일 밤 10시 서울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블랙리스트 사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면서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약칭 블랙타파)’ 발족을 알렸다.

▲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약칭 블랙타파)’ 발족식이 18일 밤 10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임인자 예술감독이 '김기춘 등 4인 블랙리스트 재판' 방청 후기를 전달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약칭 블랙타파)’ 발족식이 18일 밤 10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임인자 예술감독이 '김기춘 등 4인 블랙리스트 재판' 방청 후기를 전달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블랙타파는 △검열 및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문화예술 제도의 공공성 확립 △문화예술계 내 권위주의적 적폐 청산 등을 요구·실천하는 문화예술인의 수평적 연대기구다.

이들이 독립적 기구를 만든 이유는 한국연극협회가 구성한 비상대책기구를 신뢰할 수 없는데다 공적 기관 차원의 제대로 된 진상규명 및 수습 노력을 찾을 수 없어서다. 이해성 연출가는 “협회는 블랙리스트 문제가 한창일 때 예술인들이 들고 일어나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면서 “정대경 협회장은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취지를 언급했다.

블랙타파는 성명서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되고, 김기춘, 조윤선, 김종덕, 김종, 정관주, 차은택 등 주요 인사가 구속됐으나 아직 재판은 진행중이며, 그 집행자인 문체부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면서 “막연히 정부와 관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를 주도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왜 협회는 이를 방치했는지, 그 과정에서 블랙리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극계의 동료들은 누구인지 알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비록 진상규명 과정에서 모든 사실이 낱낱이 해부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납득할만한 규명과 진심어린 사과 그리고 적절한 책임 추궁이 따를 때, 우리 사회에 법과 정의가 있으며 역사의 과오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신뢰를 비로소 회복할 것”이라 주장했다.

블랙타파는 또한 “블랙리스트 사태는 문화예술분야의 제도와 이를 관장하는 기구가 정치권력에 봉사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구조였음을 알려준 사건”이라면서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듯 예술 제도는 예술 현장의 파트너여야 하며 국가권력이나 상급공무원이 아니라 그 예술을 만들고 향유할 예술가와 국민을 섬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유발언에 나선 한 문화예술인은 “송수근(문체부 1차관), 박명진(한국문화예술위원장) 사퇴를 꼭 우리의 손으로 이뤄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송 차관은 2014년 10월부터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일하면서 ‘건전 콘텐츠 TF팀’의 팀장을 맡으며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산 바 있다. 박 위원장은 2015년 6월부터 임기 내내 문화예술인들로부터 블랙리스트를 방조·묵인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념 균형, 정당한 공무집행” 김기춘에 “민주주의 ‘민’자도 모르는 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 블랙리스트 관련 ‘몸통’들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향해 ‘反 민주주의자’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블랙리스트는 이념 편향된 문화예술계 내 예산집행 균형을 맞춘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는 김 전 실장 측 주장에 이해성 연출가는 “민주주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이념으로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말을 법원에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고 지적했다.

▲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약칭 블랙타파)’ 발족식이 18일 밤 10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약칭 블랙타파)’ 발족식이 18일 밤 10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성명서를 낭독한 배우 권병길씨는 “블랙리스트 원리는 ‘종북프레임’이다. 여러분, 종북주의자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렇다’고 할 거냐”면서 “여러분은 정의·진실을 밝히는 사람이지, 이런 사람들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려는 정부가 이걸 만든 거다. 그들 스스로 잘 안다”고 비판했다. 세월호 추모 행동, 국정교과서 반대 등이 블랙리스트 사유인 것을 지적한 말이다.

현재 ‘김기춘 재판’을 꾸준히 방청하고 있는 임인자 예술감독은 이날 “너무나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사태가 관료사회가 동원된, 시스템이 동원된 국가폭력이라는 것을 재판진행 내내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며 “그럼에도 피고인들은 예술을 어떻게 통제하려 했는지 당연하다는 듯 발언했기에 예술가들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계속 발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검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김기춘 전 비서실장, 조윤선 및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신동철 전 국민소통비서관,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 등 장차관급 공무원 7명만 형사상 처벌 대상으로 넘겼다. 이해성 연출가는 “(그 이하 공무원이) ‘부당한 지시’에 따랐더라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돼 블랙리스트가 대체 어떻게 집행됐는지 밝혀내고, 관련 공무원에게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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