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일까. 법적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면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적폐청산을 가장 강조해온 후보마저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는 참모들의 권고를 받아 ‘자제’에 들어갔다. 물론, 선거진영의 고충을 모르지 않는다. 촛불을 매도한 세력의 ‘전략적지지’로 선거판의 경계선이 흐려진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어떤 ‘언어’를 쓰는가는 현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좌우할 수 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적폐’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고, ‘청산’은 ‘어떤 일이나 부정적인 요소 따위를 마무리 함’을 이른다. 무슨 종북이나 좌파 언어가 아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명박을 이은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대한민국은 크게 망가졌다. 본란을 통해 대통령 박근혜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로 민생경제는 위기를 맞았고, 민주주의는 후퇴했으며, 남북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기실 언론계만이 아니다. 학문적 깊이가 천박한 교수들이 박근혜에게 ‘발탁’되어 행정부와 입법부는 물론, 국책연구기관 곳곳에 포진해왔다. 뒤늦게 대학에 몸담고 보니 언론계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학계도 썩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 해결은 진보세력만의 요구일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하려면 반드시 구현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렇다. 2017년 오늘, 적폐청산은 특정 후보의 공약일 수 없다. 적폐청산을 통한 새로운 통합이 촛불민중의 준엄한 요구다.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은 대립점이 아니다. 국민통합의 선행과제가 적폐청산이다. 적폐청산 없는 국민통합은 맹목이고, 국민통합 없는 적폐청산은 공허하다.
장미대선이라는 정치 언어는 19대 대선의 역사적 성격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시대적 과제를 몽롱케 하는 ‘독가시’다. 보수나 진보의 시각차이로 볼 문제가 아니다. 대선을 본디 예정된 2017년 12월이 아니라 5월에 치르는 까닭만 짚어도 답은 자명하다.
19대 대선은 ‘촛불 대선’이다. 촛불이 시작할 때 ‘세계사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칼럼을 썼지만, ‘촛불혁명’이 갈 길은 아직 멀다. 현 단계에선 촛불의 요구와 가장 근접한 후보가 당선돼야 순리이고, 당선 뒤에는 그가 촛불의 뜻을 구현해나가도록 견인해가야 옳다. ‘사드 배치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라는 미국 정부의 논평이 더없이 모멸스러운 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