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카메라.’ 세월호 가족들은 4·16기록단을 이렇게 불렀다. 세월호 참사 초기,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가족들은 오직 이들만 ‘허락’ 했다. 독립 PD들은 가족들이 묵는 진도체육관 1층에 잠자리를 폈고 가족 외에는 참석이 불가능한 회의 등에서도 촬영을 이어갔다. 

가족들이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기록단이 정한 원칙 때문이다. 기록단 단장을 맡고 있는 박봉남 PD는 △사실을 기록한다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제작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한다 등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나아가 이 기록들을 공공의 자료로 제공한다는 원칙도 마련했다.

쉽지 않음을 온 몸으로 깨닫고 있다. 무엇보다 기록단 구성원들의 생계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매달 인건비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다른 일을 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은 갈등을 유발시키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구성원 한 명이 사실상 탈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록은 이어진다. 박 PD는 참사 직후 팽목항에서 만난 단원고 2학년 3반 소연이 아빠를 생각한다. 소연이 아빠는 양손에 각각 손가락 3개가 없다. 프레스 공장에서 사고로 잃었다. 소연이네 엄마는 연변 출신이다. 소연이가 네 살 때 집을 나갔다. 외동딸 소연이는 아빠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미수습자 중 한 명인 권재근씨는 박 PD의 중학교 3년 선배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다. 권씨 가족은 제주도로 이사를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네 식구 중 다섯 살 지연이만 살아남았다. 권씨는 청소노동자로 일을 했고 배우자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권씨와 아들 혁규군은 아직 수습되지 못했다. 

박 PD는 이 두 사람의 사례를 언급하며 “우리 사회에 쌓인 적폐의 피해자가 어떤 계층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기록단 소속 독립 PD들이 부족한 제작비를 받고도 기록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16일 오전,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박 PD를 만났다. 인터뷰는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사진=포커스뉴스
▲ 사진=포커스뉴스
“세월호로 뭔가 하려나보다”는 시선 싫어

“인터뷰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박 PD가 입을 뗐다. 실제 박 PD는 기록단 단장이지만 관련 인터뷰는 하나도 없다. 요청이 여러 번 왔지만 늘 후배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혹시나 “박봉남이 세월호로 뭔가를 하려나보다”라는 시선이 싫어서다. 그는 인터뷰 사진도 거부했다. 

공공성을 골자로 한 엄격한 원칙을 세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년 동안 그는 단 두 번의 인건비만 받았다. 그마저도 후배들이 “한 푼도 받지 않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찍기 시작한 건 “기록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인터뷰 내내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우리가 더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다큐 쪽에서 박 PD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만든 작품은 2009년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 중편 경쟁 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한국 다큐 사상 처음이었다. IDFA는 다큐 제작자들 사이에서 ‘꿈의 무대’로 불린다. 2010년에는 독립PD로는 처음으로 한국 PD 대상을 받았다.

▲ 기록단이 MBC 제작진과 함께 만든 세월호 참사 100일 다큐. 사진=방송화면 갈무리
▲ 기록단이 MBC 제작진과 함께 만든 세월호 참사 100일 다큐. 사진=방송화면 갈무리
기존 언론이 찍지 못했던 모습, 이들은 찍었다

박 PD가 진도로 내려간 건 2014년 4월 말이다. 앞서 참사 초기인 2014년 4월20일 후배 두 명이 진도로 갔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기자들은 취재수첩을 꺼낼 수 없어 휴대전화로 참사 초기를 기록했다. 심지어 기자의 휴대전화가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있었다.

언론사들처럼 무리하게 찍거나 부탁하지 않으니 가족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밤이면 가족들과 술잔도 기울였다. 미수습자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진도체육관 1층이 휑했다. 가족들이 이들에게 “1층에 내려와서 자달라”고 말했다. 빈 자리를 메워달라는 의미였다.

8월까지는 독립 PD 네 명이 진도에 붙박이로 있다시피 했다. 8월에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한다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제작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가족협의회와 협약을 체결했다. 그때부터 기록단 PD 6명은 ‘가족카메라’로 불렸다. 

기존 언론이 찍지 못했던 가족들의 모습은 이들의 카메라에 담겨 세상에 전달됐다. 2014년 7월21일 MBC 다큐스페셜 ‘사랑해 잊지 않을게’, 2014년 7월24일 뉴스타파 ‘세월호 골든타임, 국가는 없었다’, 2015년 12월18일 JTBC 스포트라이트 ‘국가의배신, 우리의 수색은 끝나지 않았다’ 등이다. 

▲ 기록단이 기록한 고 김관홍 잠수사의 생전 모습. 사진=JTBC 스포트라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 기록단이 기록한 고 김관홍 잠수사의 생전 모습. 사진=JTBC 스포트라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가족의 결단으로 수색 종료라고? 오보에 가깝다”

곁에 있어보니 가족들이 왜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지 알게됐다. 세월호 수색이 종료되던 날 보도가 대표적이다. 당시 조선일보 부국장이 었던 김창균 보도국장은 “가족의 결단으로 끝내줘서 고맙다”면서 세월호 참사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수색을 중단하지 못하게 분위기를 몰아간다고 썼다. 

박 PD 생각은 달랐다. “당시 해양수산부와 가족들을 지원하는 변호사가 중심이 돼서 수색종료 선언을 상징적으로 해버렸다. 동의하지 않는 가족도 있었다. 정부로서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때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해수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안타깝다. 박 PD는 “정부를 믿지 않지만 배를 끌어올리는 주체는 해수부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배를 올려야 한다. 그래야 가족을 찾을 거 아니냐. 해수부나 국가는 그걸 교묘하게 이용한다”고 말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세월호를 인양하는 과정에서 선체 일부가 훼손됐다. 유가족은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흔적을 없애는 것이라고 반발하지만 해수부는 “인양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미수습자 가족은 어쩔 수 없이 해수부 편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의 갈등은 커져간다. 

“해수부와 정부,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를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기록단 PD들의 마음도 편치 않다. 특정 가족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는 입장에서 누구 한 쪽 편을 들 수는 없다. 이 원칙은 정부나 해수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정부나 해수부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박 PD는 말했다. 

박 PD는 선과 악의 구분이 쉬울 수는 있어도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한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면서 “제작진의 시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다큐는 사실 관계와 다른 부분이 많다”면서 “세월호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말했다. 

▲ 기록단과 뉴스타파가 공동으로 제작한 세월호 100일 특집방송. 사진=방송화면 갈무리
▲ 기록단과 뉴스타파가 공동으로 제작한 세월호 100일 특집방송. 사진=방송화면 갈무리
가장 힘든 건 생계문제, 내부 갈등 왜 없겠나

가족들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난감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런 원칙은 명쾌하다. 정말 힘든 건 생계문제다. 참사 초기에는 박 PD가 1800만원을 차입해서 제작비로 썼다. 인건비를 넉넉하게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독립 PD들은 생계를 꾸려가면서 틈틈이 세월호를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도 남았다. 최근 한 독립 PD가 사실상 기록단 탈퇴를 선언한 것. 박 PD는 “누구든 현장을 잘 찍어서 기록물을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니것 내것 가릴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기록단으로서의 의무는 지키고 갔으면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표정에서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지금까지 3년을 찍었다. 그리고 앞으로 4년 정도가 남았다. 박 PD는 기록단 작업이 끝나는 시기를 2022년 즈음으로 잡았다. 2020년 총선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에 의지가 있는 정당, 의원이 과반 이상을 확보한다는 전제하에서다. 그러면 진짜 세월호 특별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본다. 

5.18 광주를 보면 알 수 있다. 1980년 광주에서 5.18이 일어난 지 8년만인 1988년 야3당이 공조를 해서 5.18 진상조사특별법을 만든다. 의회권력의 힘으로 전두환을 청문회에 세웠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역시 1,2년의 시간으로는 안 된다. 2022년을 목표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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