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지난 3일 출간한 ‘회고록’이 1980년 5월 ‘광주 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 그 민족적 참극의 ‘주범’인 그가 민중항쟁 37주년을 앞둔 시점에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주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이런 말도 했다. “내란으로 판정됐던 광주사태는 어느 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되더니 어느 순간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으로는 신화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주화운동이라는 인식에 어긋나는 어떠한 이의도 용납되지 않는다.” 

전두환은 새로운 ‘학설’도 제시했다. “우리 사회 저변에는 군수공장과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시민군이 국군을 공격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문을 증폭시키는 새로운 진술과 정황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공론화하는 길은 봉쇄된 것 같다.”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생이니 올해 만 86세이다. ‘회고록’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망발’을 단순히 그의 ‘고령(高齡)’ 탓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김영삼 정권 시기인 1996년 말에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적용된 ‘죄목’은 무려 13개나 되었다. ‘반란 수괴’ ‘반란모의 참여’ ‘상관 살해’ ‘내란 수괴’ ‘내란목적 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항소심 재판의 선고 내용인 ‘전두환 무기징역과 2205억원 추징’, ‘노태우 징역 17년과 2628억원 추징’을 확정 선고했다. 그런 ‘대역죄’를 저지르고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겨우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김영삼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 전두환씨가 지난 2015년 11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전두환씨가 지난 2015년 11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3권으로 이루어진 <전두환 회고록>은 마치 그런 사실들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날조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 바로 그렇다. “맨손에 태극기를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친 기미 독립선언을 ‘3·1운동’이라고 부른다. 빼앗은 장갑차를 끌고 와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행동을 3·1운동과 같은 ‘운동’이라고 부를 순 없다.” 1980년 5월 18일 시작된 광주민중항쟁 기간에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던 시민들에게 무기로 먼저 공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전두환이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계엄군이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자위책’으로 지서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에서 꺼낸 총칼로 계엄군의 양민 학살에 맞섰을 뿐이다. 그런데 전두환은 37년이나 지난 지금 그것을 ‘폭동’으로 몰아붙이면서 터무니없이 3·1운동에 견주어 극도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나는 광주사태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희생자”, “계엄군 발포 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겨레> 4월 4일자 1면 기사(‘전 각하, 자위권 발동 강조 군 기록 나와’)는 “80년 5월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건을 기무사가 보관하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 제출”한 문건에는 “‘전(全) 각하(閣下)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은 이 기사 내용에 대해 어떤 반박을 할 수 있을까?

전두환은 국가가 법으로 ‘5·18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한 광주민중항쟁을 ‘폭동’이라고 매도함으로써 그 운동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이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유족과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 따라서 그는 헌법과 형법, 그리고 민법에 따라 사법적 처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전두환의 ‘회고록’에 대해 5·18 관련 단체들과 정치권에서는 ‘지독한 자기합리화를 위해 저지른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고, 광주시장 윤장현은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문가들이 전두환을 사법적으로 응징하는 운동에 나서기를 기대한다. 

전두환은 1996년 12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 등 혐의로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뒤 2015년 11월 10일 기준으로 겨우 50.86%인 1121억원 만을 납부했다. 그런데도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면서 국민을 우롱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에 일으킨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 생도들의 시가행진’을 주도한 이래 그의 총애를 받았으며, 장교가 된 뒤에는 영남 출신 중심의 ‘하나회’를 이끌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1980년 5월 ‘서울의 봄’이 전두환 일파의 쿠데타로 무너지지 않았다면, 한국사회는 신속하게 민주화의 길로 치달았을 것이다. 

전두환은 1987년에 ‘호헌’이라는 구실로 장기집권을 꾀하다 6월항쟁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광주 학살’이나 쿠데타에 대해 단 한 마디 사죄도 하지 않다가 이번에 펴낸 ‘회고록’을 통해 반민주적이고 파렴치한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가 아무리 고령이라 하더라도 주권자들은 ‘적폐 청산’을 위해 이런 인물을 더 이상 ‘자유롭게’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두환은 이번 사건으로 엄정한 사법처리를 받고 서울구치소의 박근혜 ‘옆방’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박정희의 유신 잔재를 청소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