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1일 새벽 4시30분쯤 ‘형사 피의자 박근혜’를 태운 호송차가 서울중앙지검에서 서울구치소로 떠났다. 그로부터 2시간 반이 지난 아침 7시쯤 반잠수식 운반선에 실린 ‘세월호’가 뭍에 오르기 위해 목포신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쇠창살 안에 갇히게 된 박근혜는 ‘올림머리’도 하지 못한 채 부석부석한 얼굴로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만신창이가 되기는 했지만 세월호는 작은 배를 타고 뒤따르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애처로운 눈길을 받으며 21차례의 ‘촛불집회’ 때마다 우렁차게 울리던 노래의 리듬을 타고 흥겹게 전진하는 듯이 보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3월31일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에 실린 세월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포커스뉴스
▲ 3월31일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에 실린 세월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포커스뉴스
2014년 4월16일 오전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의문의 침몰을 당한 뒤 4년이 가까워지도록, 참사의 원인과 박근혜의 ‘행방불명 7시간’을 둘러싸고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란 리본’ 진영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그것을 덮어버리려는 ‘박근혜 일파’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의 심판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한 탄핵 사유에서 벗어났지만, 무분별하게 저지른 국정농단 때문에 결국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고 마침내 같은 감옥에서 ‘공범’ 최순실의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 ‘뇌물 및 제3자 뇌물수수’ 등 13개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박근혜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가 확정된다면 최고 무기형까지 선고받을 수도 있다. 지금 65세인 그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최악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4년 동안 국정은 총체적 파탄에 빠져버렸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그와 최순실이 국가를 ‘사익공동체’로 여기며 온갖 부정과 비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지난해 12월9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이래 법원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까지 거짓말과 ‘모르쇠’로 일관했다.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사죄를 하면서 용서를 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능과 독선, 탐욕 때문에 정치적, 인간적으로 파멸의 길로 치달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른바 ‘참모들’의 ‘달콤한 첩보(지라시 수준밖에 안 되는 것들)’에 솔깃했는지 헌재에서 탄핵소추안이 4 대 4 또는 2 대 5로 기각되리라고 확신했고, 구속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 3월30일 박근혜씨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지검에서 대기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3월30일 박근혜씨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지검에서 대기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믿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박근혜의 편집증적 정신상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왜 청와대를 ‘제 집’처럼 여기면서 불법적으로 ‘보안손님들’을 출입시키고 성형을 위해 마약성 주사까지 맞았을까?

그런 비정상적 행태의 근원에는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박근혜는 어린 시절부터 18년 동안 청와대에 살면서 언제나 밀착 경호를 받았기 때문에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다가 23세 때인 1975년 3월 초에 일제 순사 출신으로 사이비 종교인이자 전과자이며 6번이나 결혼을 한 최태민을 만나 영혼을 지배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최태민이 죽은 뒤에는 그의 딸 최순실이 대역을 맡았다. 1970년대 후반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작성한 ‘최태민 부정·비리 보고서’에 따라 박정희가 그를 투옥하고 딸로부터 격리시켰다면 박근혜가 지금 같은 나락에 떨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나라 안팎으로 악명이 높은 독재자였는데도 박근혜는 아버지를 우상처럼 숭배했다. 아래 인용문에 그런 존경심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 2011년 11월14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씨가 경북 구미시 상모동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을 마친 뒤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1년 11월14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씨가 경북 구미시 상모동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을 마친 뒤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는 부모를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정치를 시작한 뒤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당연하겠지만, 정치인이 된 지금은 그 말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가장 큰 지혜는 삶의 모델을 보고 배워서 얻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만남 중 하나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이다.(박근혜, ‘아버지의 딸로서’, 고건 외 17명 지음, <나의 삶, 나의 아버지>, 95쪽)”

그러나 실제로 박정희는 딸이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로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었다. 1961년 5월16일 헌정을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 선거로 수립된 장면 정부를 무너뜨렸는가 하면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를 일삼았다. 1979년 10월26일 그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기까지 18년 동안 고문과 거짓자백으로 조작된 ‘좌경용공 사건들’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대표적인 것은 1974년 봄에 터진 ‘인혁당 사건’이다. 그 사건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18시간 만에 서대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들이 나중에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는 물론이고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얼마나 부도덕한 인물이었는지는 여러 자료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특히 그가 중앙정보부 간부를 ‘채홍사’로 부리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궁정동 ‘안가’로 여성 연예인 등을 불러 ‘섹스 파티’를 벌인 것을 박근혜가 나중에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 박근혜씨는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 연합뉴스
▲ 박근혜씨는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 연합뉴스

박근혜는 ‘박정희 신화’ 덕분에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1998년 4월 2일 치러진 대구광역시 달성구 보궐선거에서 압승해 국회의원이 된 뒤 지난해 탄핵소추 당하기까지 18년 동안 그가 한나라당 대표를 거쳐 대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 ‘후광’으로 작용한 것은 그 ‘신화’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미신’이었다. 특히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야당 후보 김대중을 누르기 위해 조작한 지역감정의 영향으로 영남지역에서는 날이 갈수록 반호남 정서가 심해져갔고, 그 수혜자는 박근혜를 비롯한 극우보수세력이었다. 게다가 박정희가 독재자였지만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루었다는 ‘신화’ 역시 박근혜가 물려받은 중요한 정치적 유산이 되었다. 어용학자들과 극우보수언론은 그 ‘신화’가 재벌 위주의 독점자본체제를 키워 세계에서 보기 드문 빈부 격차를 빚어냈다는 사실을 호도하거나 묵살했다.

▲ 지난 16일 청와대 사랑채 대통령관에 전시된 박근혜 씨의 사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홍보 영상.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지난 16일 청와대 사랑채 대통령관에 전시된 박근혜 씨의 사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홍보 영상.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박근혜는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고 서울구치소의 독방에서 올림머리도 값비싼 화장도 못하는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것이다. 그런 상황은 그에게 ‘무덤’이나 다름없으리라. 그러나 박근혜의 악정과 실정 때문에 쑥대밭이 된 나라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권자들에게 박근혜의 ‘사적인 무덤’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역사의 무덤’에 갇힌 셈이다. 앞으로는 허황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미신’의 산물인 인물들이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주권자들이 박정희와 박근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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