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이 사람들 지금 뭐하는거야?”
“배타고 나가서 아직 집에 안 온 사람들 빨리 오라고 이름 부르는거야. 지연이도 아빠랑 오빠 얼른 집에 돌아오라고 불러. 크게 불러”
“응 권재근 돌아와”
“오빠도 돌아오라고 불러야지”
“응 오빠 돌아와”
 
세월호 참사가 100일을 맞았던 2014년 7월 24일, 다섯살 지연이가 고모에게 물었다. 이제 지연이는 여덟 살이 돼 연년생이던 오빠보다 두 살이 많다. 오빠는 여전히 여섯 살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여전히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빠도 아직 세월호에 있다.  지연이만 세월호에서 살아남았다. 세월호 참사 다음날인 4월 17일 박근혜씨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는데, 그 아이가 지연이다.
 
지연이네 네 식구는 제주도로 이사를 가다 사고를 당했다. 제주도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배가 이상하자 여섯 살 오빠는 구명조끼를 지연이에게 벗어줬다.  엄마는 2014년 4월 23일에 수습됐다. 
 
▲ 권오복씨가 26일 진도 팽목항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권오복씨가 26일 진도 팽목항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조카 생각하면 팽목항을 못 떠나겠어”
 
지연이는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닌다. 가족을 기다리는 건 큰아빠 권오복(63)씨의 몫이다. 권씨는 햇수로 3년째 팽목항에 머물고 있다. 2014년 11월 20일, 미수습자 가족들의 거처가 팽목항으로 옮겨진 이후부터 주욱 떠나지 않았다. 지난 26일 권씨를 진도 팽목항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금방 찾을 것 같아서 있었고 나중에는 화가 나서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 찾아가는데. 혁규가 너무 어린데다가 음식도 안 먹어서 애가 조그마해. 살이라고 없는 놈이야. 걔를 생각하니까 못 떠나겠어. 나중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게 아까워서 버텼지.”
 
권씨는 팽목항에서의 생활을 ‘다람쥐 쳇 바퀴’라고 표현했다. 100일, 200일, 1주기, 2주기 등 특정한 때가 아니면 팽목항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컵라면 하나만 먹으면 배고파. 라면에 밥 몇 숟가락 넣어서 먹으면 그게 한 끼여. 밤에는 참이슬이라는 것이 없으면 못 자.”
 
“세월호 뉴스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사고가 나던 날 권씨는 동생네 가족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전 7시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바빠서 점심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여름에 제주도로 놀러오라는 내용이었다. 몇 시간 뒤 뉴스에 세월호 침몰 소식이 떴다. 권씨는 그걸 보면서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복원된 세월호 CCTV에는 동생네 가족이 아침을 먹는 모습이 담겼다. “내 동생이 애 둘 하고 딱 앉아서 컵라면 요만한 거를 먹고 있어. 자기는 국물만 먹고 애들을 먹이는 게 나와. 지나가던 (단원고) 학생들이 예쁘다고 혁규를 쳐다봐. 그렇게 잘생겼는데 이렇게 된거지.”
 
지금까지 동생과 조카를 찾지 못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제수씨 시신을 석 달 가까이 냉동고에 두었던 이유다. 장례라도 함께 치르고 싶었다. 제수씨는 2014년 7월 말에 화장됐다. 제수씨 본국인 베트남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베트남에선 시신이 90일 이상 수습되지 못하면 평생 구천을 떠돈다고 한다. 
 
▲ 진도 팽목항에 위치한 미수습자 가족들의 숙소. 사진=이치열 기자
▲ 진도 팽목항에 위치한 미수습자 가족들의 숙소. 사진=이치열 기자
“우리는 간절하게 찾아야하는 약자니까”
 
사고와 함께 권씨의 일상은 멈췄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살던 집을 팔았다.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에서 500만원도 대출할 예정이다. 건강도 좋지 않다. 팽목항에 머물면서 이빨이 세 개 빠졌다. 이유는 권씨도 모른다. 다만 이빨이 빠지는 가족들이 많다는 것만 안다. 
 
“3년 동안 가장 힘드셨던 때가 언제냐”고 묻자 “매일 매일이 다 힘들었어. ‘가장’을 넣으면 안되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더 암담한 건 이 힘든 생활에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세월호가 올라오긴 했지만 언제 찾을 지도 모르고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니까.” 권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권씨는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권씨뿐 아니다. 지난 25일 미수습자 가족들은 일렬로 서서 취재진을 향해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한 명까지 다 수습할 수 있도록 정부 관계자와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우리는 간절하게 찾아야 하는 약자니까. 말 잘 해서 뺨 맞을 거 없잖아.” 그래서 권씨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어느 기자가 됐든 오면 고맙지. 초기에 TV조선은 아무도 인터뷰를 안 해줬어. 그런데 나는 했어. 고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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