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는 참여정부라는 말도 삼성 구조본 팀장회의에서 만든 걸 그대로 갖다 썼다”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에서 정부명칭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다른 내용의 증언도 있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참여정부라는 이름은 분명히 (노무현 정부) 인수위에서 정했다”며 “아마 논의 과정이 삼성 측에 전달돼 구조본 임원들이 이야기를 나눴고 그 기억을 김 변호사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구조본은 이후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등으로 이름만 변했을 뿐 삼성그룹 모든 계열사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곳이다. 김 전 팀장은 계열사 사장을 ‘얼굴마담’이라고 표현했다. 구조본은 이건희 일가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은 미래전략실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삼성은 노무현 정부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

2003년 6월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개인소득이 만불이라 불경기가 있다”며 “2만불이면 된다, 2만불 될 때까지는 조금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언급했던 ‘국민소득 2만불시대’는 이 회장의 입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같은달 30일 노 전 대통령은 신라호텔에서 열린 참여정부 경제비전 회의에서 ”한국 경제는 지난 8년 동안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하루 속히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 지난해 10월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입구 모습. 사진=포커스뉴스
▲ 지난해 10월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입구 모습. 사진=포커스뉴스

2002년 대선 당시 삼성 구조본 팀장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회창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학수 부회장은 달랐다. 이학수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과 사적으로도 친했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경우 삼성에도 좋을 것으로 예상했다. 김 전 팀장은 “심지어 삼성경제연구소가 아예 정부부처별 목표와 과제를 정해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윤석규 전 열린우리당 원내기획실장에 따르면 노무현의 오른팔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2002년 봄부터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출간한 ‘국가전략의 대전환’이란 책을 들고 다니며 노무현 후보 대선공약에 반영하자고 했다. 노무현 취임 당시 인수위 2개월을 정리한 국정운영백서와 함께 삼성경제연구소가 작성한 국정운영백서도 당선인에게 전달됐다.

2003년 참여정부가 처음으로 추진한 경제정책은 법인세 인하와 저금리였다. 2001년 한나라당의 법인세 인하 강행에 대해 “한나라당이 소수 특권층을 위한 정당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특권층’을 의식한 당리당략에 매달린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비판했던 노무현이었다.

2004년 정부·여당은 골프장 개발업자가 행정 절차를 밟는 기간을 기존 3~4년에서 1~2년 정도로 크게 줄이는 등 건설규제를 대폭 축소하는 골프장 규제완화,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 내용 완화 등 친재벌정책을 쏟아냈다. 한나라당은 금산분리와 출총제 완화·폐지를 주장할 때 “노무현 정부에서 주장했던 법안”이라는 걸 근거로 삼는다. 재벌가문이 적은 지분으로 거대기업집단을 소유·세습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제도다.

이제는 근로계약의 관행이 된 몇 개월 단위 ‘쪼개기 계약’의 시발점은 2004년이다. 정부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마련했다. 비정규직이 2년 이상 일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전면 확대된 비정규직이 2년이 되기 전에 쫓겨날 것이란 지적에도 정부·여당과 한나라당은 이를 강행했다. 법이 통과되자마자 2006년 대형마트 홈에버가 비정규직 직원 수백 명을 내쫓았다. 영화 ‘카트’와 웹툰 ‘송곳’의 모티브다.

2004년~2006년 중소기업고유업종보호제도가 단계적으로 폐지됐다. 자유시장경쟁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을 잠식할 수 있는 빌미를 정부가 만든 셈이다.

정부는 2006년 한미FTA 협상을 시작했다. 이명박-부시 정부 때 타결됐지만 오바마 정부가 재협상을 요구해 2012년 3월 정식으로 발효됐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지난 17일 “한·미 FTA 5주년…드러난 ‘사기극’”이란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2015년 기준, 한국은행 자료에 따른 대미 무역수지는 452억 달러지만 통관기준 무역수지는 258억 달러다”라며 “차이가 나는 194억 달러는 주로 수출 대기업의 미국 내 현지판매를 말한다”고 지적했다. 재벌혜택이란 지적은 협상초반부터 있었다.

참여정부의 삼성 구하기

정권 초인 2003년 12월10일 이학수 당시 구조본부장은 2002년 대선 전 이회창 후보 측에 100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삼성은 즉각 ‘관리전략’을 수정했다. 한겨레가 입수한 ‘회장 지시 사항’ 문건에 따르면 이틀 뒤인 12일 이건희 회장은 “호텔할인권을 발행해 추미애 같은 돈 안 받는 사람에게 주면 부담 없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 노무현대통령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2004년 2월14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에서 회견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노무현대통령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2004년 2월14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에서 회견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청와대도 움직였다. 2004년 2월14일 노 전 대통령은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과 취임 1년 특별대담에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기업인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로 바로 진행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16일자 중앙일보 1면에 보도됐다. 검찰은 불법 대선자금 385억 원을 제공한 이건희 회장을 무혐의, 이학수 부회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2005년 7월21일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다음 대화는 1997년 10월 안전기획부가 녹음한 내용이다.

이학수 “(이건희) 회장님께서 몇 가지 방침을 말씀하셨다. 이회창한테 보내는 것은 홍석현 사장 계속 통하라고. 늙은 사람(김대중)은 어떻게 진행되느냐 물으시면서 이인제 관계도 언급하셨다”

홍석현 “회장님께서 전에 지시한 건데 B검사장에게 2000만원 줘서, 작년에는 3000만원 줬지만 올해는 2000만원 줘서 자기도 쓰고 이름 모르는 애들(후배검사)에게 나눠주라고”

이건희 지시로 정치권과 검찰에 로비한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다. 이에 청와대는 삼성과 국정원의 이해관계를 엮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했다. 2005년 7월 청와대는 안기부 후신인 국정원 최고정보책임자(CIO, 차관보급)에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를 임명했다. 처벌대상인 삼성과 국정원에 모두 면죄부를 주는 꼴이었다.

2005년 8월8일 노무현은 기자간담회에서 “정·경·언 유착이라는 것과 도청문제, 어느 것이 본질이냐 이런 문제제기가 중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게 물으면 도청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고 본질적인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대통령 말은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해 검찰수사는 불법도청 쪽으로 흘러갔다. 이건희는 구속은커녕 기소도 되지 않았다.

2007년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양심선언을 바탕으로 삼성의 불법을 알렸고, 삼성특검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다시 청와대가 나섰다. 보름 뒤인 11월16일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특검법과 함께 공직자부패수사처법이 (함께) 통과되지 않으면 저희로서는 (특검법)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는지도 검토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공수처법은 각 당의 이해관계가 달라 통과가 어려운 법이었다. 공수처법을 핑계로 특검법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노무현 정부의 삼성인사

노무현 정부의 친삼성 기조는 인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은 이를 합리화한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기용한 것, 삼성장학생이라고 비판받는 이광재를 국정상황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유명하다.

윤석규 전 실장은 이광재가 엘리트 관료 몇 사람의 명단을 거론하며 이 사람들과 일을 해야한다고 밝혔는데 이 중 김진표, 박봉흠, 최종찬, 윤진식 등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김진표는 삼성특검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표적인 삼성장학생으로 알려진 인물로 2003년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부총리 등을 맡았다. 박봉흠은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등을 거쳐 삼성중공업 사외이사로 갔다. 최종찬은 2002~2003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역임했고, 18대~19대 총선에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으로 출마했다. 2003년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윤진식 역시 같은 선거에 같은 당으로 출마했다.

반면 삼성의 금산법 위반을 지적하는 등 삼성에 불편한 목소리를 낸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등은 정부에서 배제됐다. 김용철 전 팀장은 “정권 초 안희정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며 노 전 대통령과 삼성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순진한 오해였다”고 했다.

김 전 팀장의 내부고발 뒤 청와대 관계자가 그에게 국세청장 후보자 셋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모두 삼성이 관리해 온 국세청 간부들이었다. 김 전 팀장은 국세청 밖 조세전문가는 어떠냐고 제안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권 말기라 ‘개혁인사’는 못한다”고 거절했고, 그 중 한명이었던 한상률이 국세청장이 됐다. 한상률은 인사청탁 의혹으로 2009년 1월 물러났다.

친노와 친삼성

참여정부의 수혜를 받은 인사들은 친재벌 정책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2015년 2월13일 박영선 의원이 ‘특정재산범죄수익 등의 환수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이른바 ‘이학수법’을 발의했다. 삼성 SDS 주식 상장 등을 계기로 유죄판결 받은 범인과 수혜자들의 이익을 환수하고 피해자를 구제하자는 내용이다. 이재명 후보의 재벌이익환수법도 이학수법을 근간으로 한다. 당시 당대표였던 문재인은 이 법에 서명하지 않았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1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정책공간 국민성장'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3차 포럼 재벌적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 참석해 내빈들과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1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정책공간 국민성장'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3차 포럼 재벌적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 참석해 내빈들과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지난해 10월6일 출범한 문재인의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에는 대학교수 등 5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주도하는 인물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보좌관 영국대사를 지낸 조윤제 서강대 교수다. 그는 GS그룹, 동양종금증권(오리온그룹)과 신한은행, STX중공업(STX그룹) 등에서 사외이사를 지내 재벌과 이해관계를 맺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1주일 뒤인 10월13일 프레스센터에서 4대재벌 경제연구소 소장들과 간담회에서 ‘낙수효과’, ‘분수효과’, ‘국민성장’ 등을 언급한 뒤 “요약 하자면, 나는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여전히 재벌 대기업이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벌특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으로 시작하지만 여전히 대기업 위주의 성장에 방점을 찍는다.

지난달 15일 문재인 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박봉흠(참여정부 기획예산처 장관, 삼성중공업, 삼성생명 등 사외이사)도 포함됐다. 또한 김성진(전 해수부 장관) 삼성증권 사외이사, 이영탁(전 국무조정실장) 제일모직 사외이사, 현대모비스 사외이사, 오영호(전 산자부 차관, 코트라사장) 호텔신라 사외이사, 키움증권 사외이사, 이승우(전 금감위 부위원장, 예금보험공사 사장) 삼성증권 사외이사 등 전체 37명 중 15명이 재벌과 이해관계가 있는 인사다.

문재인 캠프 내부도 마찬가지다. 공동선대위원장이면서 일자리 위원장은 위에서 언급했던 김진표다. 캠프 전략기획본부장 전병헌은 문재인과 함께 이학수법에 서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공약인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치는 바로 세우고)’를 설계한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박근혜 싱크탱크) 원장도 15일 문재인 캠프에 합류했다.

▲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월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에 앞서 발언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월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에 앞서 발언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안희정 캠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희정의 경제멘토는 이헌재 전 부총리(여시재 이사장)와 변양호 보고펀드 고문이다. 둘 다 ‘론스타 먹튀사건’의 공범이다. 이 전 부총리는 2007년 2월4일 노무현 정부 국정홍보처에서 발행한 국정브리핑에서 조차 ‘노무현 정부 최대 실정으로 꼽히는 부동산값 폭등의 주범’으로 언급된 바 있고, 2004년 김병기 전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장을 삼성경제연구소에 취업청탁을 한 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제 자칭 노무현들은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한 문재인 후보는 지난 17일 “(법인세를 갑자기 올려서) 기업이 죽으면 어떡하냐”고 말했고, 안희정 후보는 지난 1월 “증세논쟁은 징벌적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며 법인세 인상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법인세 인하 공약에 대해 비판하던 때와 비교하면 노골적이다. 새 정부는 삼성로비를 견딜 수 있을까? 캠프 내 개혁인사들은 노무현 정부와 달리 5년 내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노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강압수사에 못 이겨 억울하게 죽은 뒤 노무현 정부는 성역이 됐고, ‘친노’는 정치적 자산이 됐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상위 1%가 국민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2%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위 10%의 소득 비중도 48.5%에 이른다. 이명박근혜와 노무현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이 재벌 등 소수 기득권자와 다수 서민의 격차를 가리고 있다.

※ 참고문헌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MBC 뉴스후 ‘삼성비리의혹 본질을 말한다’(2007년 11월)
심정택, 유력 대선 후보 뒤에 숨은 삼성의 조력자
프레시안, “노무현의 ‘한미FTA’, 삼성의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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