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만 명을 기록한 ‘탄핵 촛불’의 사회개혁 요구가 정권 교체가 아닌 적폐 청산 구호로 이어질 수 있을까. 국회 탄핵 가결 이후부터 시민사회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고민이다. 본격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며 ‘명령자’였던 촛불의 위상이 ‘민원인’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깊어지면서다.

이 같은 고민은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이전부터 탄핵 촛불을 이끌어왔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내부에서 제기돼왔다. 퇴진행동은 현재 전국 시민사회단체 3000여 개가 모여 있는 연합단체다. 지난해 10월 ‘최순실게이트’가 본격 터진 후인 11월9일, 4·16연대, 민주주의국민행동, 민중총궐기운동본부,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전국 1500여 단체가 “박근혜 퇴진이라는 국민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인 것이 발단이다.

고민의 핵심은 ‘촛불’과 ‘야당’의 위상이 정반대가 됐다는 것이다. 탄핵 국면 이전엔 촛불집회가 야권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엔 그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탄핵국면이 시작되자마자 공은 국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적절한 대응을 찾지 못해 시민사회진영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과 동등한 정치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이자! 광화문으로! 촛불 승리를 위한 2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이자! 광화문으로! 촛불 승리를 위한 2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퇴진행동의 한 핵심 관계자는 “박근혜의 퇴진은 광장의 의견이 관철되는 과도정부수립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했고, 이 힘으로 대선을 이끌어 대선 이후 광장의 의제가 관철되는 사회 건설로 귀결돼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퇴진행동은 필요한 정치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국회가 촛불의 성과를 가져갔고 더이상 촛불·광장에 기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퇴진행동 측은 적폐청산이란 청사진 아래 6대 긴급 현안 및 30대 우선 개혁 과제 해결을 주장해왔다. 지난 1월 중순부터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로부터 퇴진행동이 취합한 요구들이다.

1월 중순부터 제시된 6대 긴급현안은 △세월호 진상규명 △박근혜정권의 폭력살인 “백남기 농민 특검”실시 △사드(THAAD) 한국배치 중단 △국정교과서 폐기 △성과퇴출제 등 노동개악 추진 중단 △언론장악금지법 처리 등이다. 퇴진행동은 이와 함께 지난 20일 국회를 향해 재벌체제·정치·선거제도·불평등 사회·공안통치기구·남북관계·위험사회 구조 개혁안을 제시했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백남기 농민 특검의 경우는 퇴진행동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와 2015~2016년 동안 이어진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사태가 탄핵 국면을 조성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점에서다.

▲ 2016년 11월5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던 서울 종로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서 열린 노제의 맨 앞자리에 백남기 농민의 대형 초상화가 놓였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6년 11월5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던 서울 종로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서 열린 노제의 맨 앞자리에 백남기 농민의 대형 초상화가 놓였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특히 탄핵 촛불이 처음부터 활발하게 타오를 수 있었던 데엔 ‘백남기 투쟁본부’의 힘이 있었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수사기관의 강제 부검 시도를 계기로 전국 각 분야의 시민사회단체가 모이는 ‘시민 투쟁본부’가 결성된 상황이었다. 이들이 지난해 11월 대규모 집회 ‘민중총궐기’를 준비하던 차에 최순실 게이트가 겹치며 10월29일 1차 촛불, 11월5일 2차 촛불을 같이 이끌었고 11월12일 100만 명이 넘게 집계된 3차 촛불집회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다.

퇴진행동 내에서는 “탄핵 인용 후 정국이 전면 대선체제로 들어서면 이러한 적폐 청산 요구가 ‘민원 제기, 청원 수준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관계자는 “실제로 언론보도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이 책임있게 적폐청산을 가져가고 있다고 보느냐”면서 “대선국면에서 퇴진행동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기자회견, 정책제안 등으로 좁혀질 것”이라 지적했다.

지난해 11~12월 탄핵 촛불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세력과 전략적으로 공조하지 못했다는 점이 요인으로 지적된다. 12월9일을 기점으로 국회로 정국 주도권이 이동할 것을 대비해 국회를 통제할 만큼 영향력을 만들어 놨어야 했다는 것이다. 야당 의원들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만들면 정치적 책임을 물릴 여지가 있었다. 또한 국회권력과 시민진영이 함께 하는 기구가 힘을 얻음으로써 퇴진행동이 향후 국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도 얻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 3월11일 열린 제20차 박근혜퇴진 범국민공동행동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힘으로 이뤄낸 탄핵을 자축하는 폭죽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3월11일 열린 제20차 박근혜퇴진 범국민공동행동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힘으로 이뤄낸 탄핵을 자축하는 폭죽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퇴진행동 내 다수 운영진은 이를 추진하려 했으나 ‘야당의 정치노선은 믿을 수 없다’는 의견그룹과 합의를 이루지 못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정당인 정의당 또한 같은 이유로 5~6차 촛불집회 때까지 퇴진행동에 함께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진영이 단일한 정치기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한 요인으로 지목됐다. 관계자는 “통상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율은 30%로 보는데 정의당, 노동당, 민중연합당, 녹색당 등 진보정당이 분열된 상황에서 2016년 총선 때 총 9.8% 지지율만 나왔다. 지지율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면서 “이재명 성남시장의 부상을 보면 안다. 이들이 진보적 유권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정치적 발언·행동을 못하는 상황에서 야권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 퇴진행동은 오는 5월9일까지 ‘의제관철운동’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동안 시민들이 요구해 온 6대 긴급 현안 및 30대 개혁 과제를 관철시키는 활동들을 이어나간다는 입장이다. 시민의 직접행동이 탄핵을 이끌어 낸 성과를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한편,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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