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홍석현 회장이 실시간 검색어 1위다. 중앙일보, JTBC 회장을 사퇴하고 ‘국가를 위한’(?) 활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이를 두고 대선에 직접 나오느냐, ‘킹 메이커’가 되기 위해 유력 대선주자 캠프에 뛰어 드느냐를 두고 말들이 많다. 이미 홍석현 회장이 중앙일보를 통해 ‘리셋 코리아’ 캠페인을 할 때도 “마치 대선 출마 하려는 사람 같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이번에는 회장직까지 내려놓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이렇게 말하면 ‘안희정스러운’ 건가?) “내가 나라를 망쳐 보겠소”라며 정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의 ‘선의’를 들어보기 이전에, 그의 ‘존재’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에서 ‘홍석현’ 이름 석자가 갖는 존재적 의미를 좀 살펴보겠다.

*모든 인물의 직함은 생략한다. 직함 붙일 때 항상 경력 중 최고 높은 직책을 부러 찾아 붙이고는 하는데, 난 이게 권위주의의 산물이라 본다.

1.

홍석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촛불 정국이 계기였다. ‘박근혜 하야’ 얘기가 나오고, 촛불 시위가 “미완의 혁명인 제2의 4·19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들이 자주 나왔다.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하야와 4·19 혁명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4·19혁명이 ‘미완’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어떤 이는 ‘내각제’가 문제라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내가 보기에 4·19혁명이 흐지부지 된 가장 큰 원인은 ‘인적청산’ 부실이다. 장면 내각이 들어섰지만 사실 ‘그 밥의 그 나물’이었다.(이 대목은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4·19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처벌 대상 책임자 중 한 명이 홍석현의 아버지인 홍진기이다.

2.

홍진기는 1917년 서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공부를 잘했던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1942년 판사 시보로 시작해 1944년 9월 전주지법 판사로 부임했다. 일제 판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 처벌을 피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지만, 그 당시에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승승장구했다. 미군정 법제부에 들어가 법률전문가로 활약했고, 이승만 정권 출범 후에는 대검찰청 검사가 되고, 법무부 차관에 이어 장관까지 고속 승진했다. 그 시절 보안법을 엮어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 폐간을 주도했고,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엮어 기소했고, 사형 집행 명령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1960년 4·19가 터졌다. 3·15 부정선거로 시국이 흉흉해지자 이승만은 홍진기를 내무장관에 앉혔다. 경무대(현 청와대)로 시위대가 몰려오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했고, 초등학생 포함 100명 이상이 숨졌다. 홍진기는 법정에서 “최선을 다해서 막도록 하라고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어쨌거나 홍진기는 당시 경찰 총 책임자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징역 9개월로 감형됐다. 그런데 이듬해인 1961년 5·16이 터졌다. 민심을 얻어야 할 군사정권은 장면 정권의 미지근한 처벌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군사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은 홍진기는 ‘사형’을 선고 받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됐는데, 그 때 ‘은인’을 만난다. 홍진기와 감방에 같이 있던 인물 중에 신현확이라고 있었다. 경성제국대 후배인가 그런데, 신현확은 일제 강점기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산업 관련 관료를 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이승만 정권에서 나이 서른아홉에 부흥부 장관(지금의 산자부 정도)을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홍진기와 함께 수감됐다.

3.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이병철이다. 이병철이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만들 때 적극 도왔던 이가 신현확이다. 당시 우리 경제는 미국 원조를 바탕으로 먹고 사는 구조였다. 미국은 원당, 원면 등 원자재 위주로 무상 원조를 했는데, 원조 물자를 분배하는 관료들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병철은 신현확에게 신세를 많이 진 셈이었다.

이병철이 박정희 정권에 로비해 신현확 구명 운동을 펴는데, 그 때 신현확이 ‘한 명 더’ 부탁한다. 홍진기를 지목하며 “살려서 곁에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병철은 홍진기를 만나봤다. 홍진기에게서 “박식하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내다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이병철은 홍진기의 옥바라지를 하고 구명운동을 폈다. 아마 사법계에 두터운 홍진기의 인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1963년 홍진기는 특사로 풀려났다.

▲ 홍진기 전 중앙일보사 회장
▲ 홍진기 전 중앙일보사 회장
그 당시 ‘삼분파동’(설탕 밀가루 등 폭리를 취하고 정치자금 제공) 등을 겪은 이병철은 독자적인 언론권력을 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964년 서울중앙라디오방송을, 1966년 중앙일보를, 1969년에 동양방송(TV)을 차리는데, 감옥에서 나온 홍진기에게 맡겼다. 그 사이 1967년에는 셋째 아들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켜 ‘사돈 관계’라는 혼맥 관계까지 구축했다.(홍진기는 전주에서 판사하던 시절 큰 딸을 얻고,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羅喜’라 이름을 지었다고)

4.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맡은 홍진기는 이병철의 ‘언론 파트’ 핵심이 돼 거의 한 몸이 됐지만, 사법 권력에 대한 야심을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정희 정권 시절 사법 권력의 핵심 인물 중 신직수라고 있다. 박정희가 5사단장 할 때 법무 참모를 하다가 5·16 이후에는 검찰 권력의 핵심이 됐다. 서른여섯에 검찰총장을 하고 1971년에는 법무장관을 하면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1973년부터는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등을 만든, 그러니까 ‘나쁜 놈’이라고 자신있게 말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홍진기는 장남 홍석현을 신직수의 딸 신연균과 결혼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다. 홍석현의 장인인 신직수가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김기춘을 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진기의 ‘혼맥 쌓기’는 전두환 정권 실세로 이어진다. 막내 딸 홍라영을 통해 5공 실세 노신영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

홍진기는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 회장직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언론계보다 사법계에서 ‘존경’ 받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대 법대에는 그의 호를 딴 ‘유민홀’이라는 공간이 있다.

5.

이 정도만 봐도 홍진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애비의 책임을 자식에게 물어서 될까.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홍진기와 이병철의 관계. 그러니까 중앙일보와 삼성의 관계는 대를 이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다.

이병철의 사업 스타일이 ‘동업’을 탄탄하게 가져간다는 것이라고 한다. LG, GS 가문과의 동업도 유명한 얘기이고, 이익이 되는 인물들과는 철저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동업을 유지했다고 한다.(어쩌면 '정권'도 동업자로 생각했을 수도) 이병철은 홍진기도 '동업자'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홍진기가 먼저 저 세상을 뜨자 그렇게 슬퍼했다고 한다.

홍진기는 자녀 교육 계획을 어떻게 세웠을까? 이병철에게서 받은 중앙일보도 물려줘야 하고, 자기의 뿌리인 사법 권력에도 계속 발을 담궈야 하지 않았을까.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이치열 기자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이치열 기자
큰 아들 홍석현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간다. 혹시 삼성전자에 보내려 했나? 아니면 법대 가기에는 성적이 모자랐나?(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가 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홍석현은 미국 유학 중 전공을 경제학으로 튼다. 그러다 1977~1983년 세계은행 조사역을 하고 귀국해 재무부장관 비서실, 대통령 비서실 등에서 근무하고 삼성코닝에서 부사장까지 한다. 그리고 1994년부터 중앙일보를 맡았다.

그 시절 안기부 도청팀이 여기저기 도청을 많이 하고 다닌 모양인데, 1997년 대선을 앞둔 어느 날, 이건희의 ‘그림자’인 이학수와 홍석현의 대화를 녹음했다. 검사들에게 ‘떡값’을 돌린 이야기, 정치자금 돌리는 이야기 등의 대화가 오가는데, 홍석현이 “15개는 괜찮은데 30개는 무겁더라고”라고 말한 대목이 유명하다. 직접 돈 심부름을 하고 다닌 것이다.

6.

X파일 사건은 2005년에 터졌다. 홍석현이 노무현 정권에서 주미대사를 하고, 유엔사무총장 출마 의사를 밝히는 등 잘 나가던 때였다. 당시 항간에는 노무현 정권이 차기 정권으로 ‘좌 근태-중 동영-우 석현’ 경쟁 구도를 그리고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홍석현은 ‘정치권력’ 획득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러다 X파일 사건 한 방에 와르르. 게다가 ‘배달사고’를 쳐 30억을 ‘인 마이 포켓’ 했다느니, 좀스러운 소문도 많이 돌아 위신이 한참 구겨졌다.

그 전에도 위신을 구긴 적이 있다. 유명한 일화가 1999년 “사장님 힘내세요” 사건이다.

사실 언론사를 하면 ‘면’은 서지만 큰 돈벌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인지 1983년 이병철은 홍진기에게 TV브라운관 납품을 맡겼다. 그 시절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 활황을 생각하면 얼마나 장사가 잘 됐겠나. 그게 ‘보광’이라는 회사다. 홍씨 가문도 일약 산업 재벌 반열에 올랐고, 휘닉스파크, 패밀리마트(지금의 편의점 CU) 등 내수 서비스, 유통업에도 공격적으로 진출한다. 중앙일보와 보광은 한 몸인 셈이다.

그런데 DJ가 대통령이 된 뒤, 보수언론들이 대거 세무조사를 당한다. 조선, 중앙도 날뛰었지만 중앙이 특히 그랬다. ‘보광’이라는 회사를 끼고 있어서 털릴 게 많았던 거다. 그 때 털어보니 탈세와 자금세탁에 쓰인 은행통장만 1000개가 넘고 목도장만 수백 개였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전해온다. 이 일로 홍석현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갈 때 중앙일보 기자들 40여 명이 도열해 “사장님 힘내세요” 빠이팅(!)을 외친 거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몄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결국은 홍석현 얼굴 먹칠 흑역사가 된다.

▲ 2008년 3월4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08년 3월4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병철은 정치권력보다 언론권력의 수명이 길다는 생각에 언론사를 차렸지만, 홍석현은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론권력 쥐었으니 이제는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아니면 국가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진심이었을지라도. 어쨌거나 좋게 말해도 언론 권력만으로는 자신의 이상 실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7.

뒤에 온 노무현 정권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주미대사까지 했겠지. 중앙일보의 논조도 노무현 정권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원래 중앙이 조선이나 동아에 비해 리버럴하기는 하다. 그러나 홍석현의 행보 덕에 중앙은 언론계에서 ‘기회주의적’이라고 여겨지고는 한다. 그래도 몇몇 꼴통 선배들 나간 뒤에는 그나마 ‘합리적’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정도로 봐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다 X파일로 무너진 위신을 살릴 기회가 왔으니, 이명박 정권이 선물해준 JTBC와 2013년 손석희 영입이다.

JTBC는 TV조선이나 채널A와 달리 드라마나 예능에 물량을 투입해 ‘고퀄’을 유지하며 차별화를 했고, 손석희 영입을 통해 보도 부문에서도 ‘꼴통끼’를 빼며 무너진 KBS와 MBC의 보도 경쟁력 대체자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영리했다.

홍석현은 1994년 중앙일보 맡을 때도 (미국 물을 먹어서인지) 가로짜기 판형, 섹션화, 전문기자 도입, 비교적 리버럴한 논조 등을 통해 중앙일보 성장의 큰 역할을 한 건 맞다. 운도 좋았다. 역설적이게도 삼성과의 관계라는 태생적 한계가 X파일 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리 됐다.

그러다 촛불 정국 방아쇠(최순실 태블릿 보도)까지 당겼으니 홍석현은 “손석희를 삼고초려해 모신 게 나야”라고 자랑하고 다니며, 못다 이룬 꿈을 다시 꾸는 것 아니겠나.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사진=JTBC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 사진=JTBC
8.

그런데 난 홍석현의 야망이 불편하다.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선의(?), 비교적 합리적인 이념적 스탠스, 언론사 경영을 통해 보여준 시장(혹은 사회) 분석 및 예측 능력 등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는 한 때 언론계에서 ‘계몽군주’로 통했다. 동아일보가 무능력한 사주를 만나 몰락하는 가운데 중앙일보는 홍석현이 유능해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홍진기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전자공학도가 돼 엔지니어가 될 수도, 세계은행에 근무하며 개발도상국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관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혹은 삼성에게서) 중앙일보를 물려받는 순간, 그는 ‘홍진기의 아들’로 남은 것이다.

좋다. 아버지 시대의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가혹한가. 보광이라는 기업은 홍씨 일가가 쥐고 앉아 지배하고 있다. 검사하면서 삼성의 떡값 심부름을 하던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검찰총장 꿈은 접은 뒤 검사 일과는 상관도 없는 BGF리테일(편의점 CU) 회장 노릇을 하며 가업을 잇고 있다.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회사인가. 이게 온전히 그들 가문이 이룩한 업적인가. 무엇보다 홍석현은 아들 홍정도에게 중앙일보와 JTBC를 그대로 물려주고 있지 않은가.

9.

2017년.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계층 이동을 위한 사다리는 무너졌고, 금수저-흙수저 한탄이 봄날 황사 미세먼지처럼 나라에 뿌옇게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홍석현의 ‘선의’는 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 아들과 며느리, 형제, 자매와 조카들까지 일가 전체가 동원돼 잔뜩 쥐고 있는 재물과 권력을 놓지 않는다면 그의 선의는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쥐기 위해서는 지금 손에 쥔 것을 놓아야 한다. 홍석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재정립 없이 군중 앞에 서는 순간, 그는 ‘계몽군주’가 아니라 분수를 모르고 나라의 군주가 되고자 하는 ‘꼰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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