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들이 동의하지 않은 취업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그간 사측이 노사 간 합의를 근거로 비정규직에게까지 임금피크제 등 불이익 조항을 일방적으로 적용해 온 관행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는 지난 2월9일 신한은행 관리지원계약직 52명이 신한은행을 상대로 낸 취업규칙변경무효확인 등 소송에서 "계약직원의 동의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신한은행 관리지원계약직원들은 "자신들은 임금피크제 도입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지난해 3월 임금피크제에 관한 취업규칙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들은 '재취업' 조건으로 2009년 12월에 명예퇴직해 2010년 1월부터 계약직으로 재입사한 직원들이다. 이들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퇴직 전에 비해 40% 삭감된 임금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신한은행 노사 합의로 도입된 '임금피크제 운영지침'이 지난해 1월1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20~60%까지 추가로 임금이 삭감된 것이다.

▲ 양대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5년 9월7일 오후 서울 성동구 천호대로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지방공기업 CEO 임금피크제 설명회'에 참가해 설명회 시작을 지연 시키며 임금피크제 중단을 촉구하자 한 참가자가 농성 중단을 권유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양대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5년 9월7일 오후 서울 성동구 천호대로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지방공기업 CEO 임금피크제 설명회'에 참가해 설명회 시작을 지연 시키며 임금피크제 중단을 촉구하자 한 참가자가 농성 중단을 권유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신한은행과 전국금융산업노조 신한은행지부는 2015년 9월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2016년 1월부터 만 55세부터 정년까지 5여 년 간 순차적으로 직원 임금을 삭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비정규직인 관리지원계약직 노동자들은 신한은행지부 가입 권한이 없어 동의 여부를 표시한 바 없음에도 신한은행은 이들에게까지 임금피크제를 일괄적으로 적용했다.

이에 대해 원고 측 법률 대리인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관리지원계약직 근로자들이 조합원인 정규직원과 임금 등 근로조건이 달랐음에도 원고들이 가입하지 못한 노동조합과의 합의로 인해 관리지원계약직까지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적용"한 것이라며 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절차' 위반이라 주장했다.

근기법 제94조 1항 단서조항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정한다.

피고 신한은행은 "한 사업장의 상시 근로자 절반 이상이 적용받는 단체협약은 다른 근로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취지의 노조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35조를 들며 "임금피크제 합의는 유효한 것"이라 반박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관리지원계약직원에게는 단체협약의 일반적 구속력이 적용될 수가 없고, 관리지원계약직은 조합원인 정규직원과는 다른 근로조건 기준이 적용돼 왔다"면서 "관리지원계약직의 동의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김 변호사는 "최근 정년연장과 관련하여 정규직 노조와의 합의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조합원인 계약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 보호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앞으로는 사용자가 조합원, 정규직과 근로조건이 다른 비조합원, 계약직 비정규직에 대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때 정규직으로 조직된 과반수 노조가 아니라 비조합원 계약직 비정규직의 동의를 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한은행은 패소에 불복해 지난달 17일 서울고등법원에 항소심을 제기했다. 원고 측 52인이 1심에서 신한은행 측에 청구한 배상액은 3억9438만 원 가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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