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통신 기사 '불법 비정규직화' 악습, 이번 기회에 끊어낼 수 있을까.

서울시가 불법적으로 통신 설치·수리기사를 비정규직(도급 고용)으로 고용해 온 정보통신공사업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기사 전원이 비정규직인 사업장 등 '최악의 불법고용 사업장'부터 본보기로 처벌해달라는 요구가 함께 거세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10일부터 서울시 내 원·하청 케이블·통신업체 모두에 정보통신공사업 실태 조사를 시작했다. 현행 정보통신공사업법은 제한된 조건에서만 도급(개인사업자) 계약을 허용함에도 불법적인 도급 계약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CJ헬로비전, 티브로드, 현대HCN 등 원청 기업과 이들로부터 설치·수리 업무를 떠맡은 30개 협력업체가 대상이다.

▲ 전신주 작업 중인 LG유플러스 개통 기사 모습. 사진=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
▲ 전신주 작업 중인 LG유플러스 개통 기사 모습. 사진=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

현장 기사들이 이번 실태조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케이블·통신 도급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만들 기회가 다시금 주어졌기 때문이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CJ헬로비전, 티브로드 등의 통신 설치·수리기사들 노조가 있는 희망연대노조(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희망연대노조)는 지난 2014년부터 다단계하도급에 대해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 요구하는 등 문제 해결에 앞장서왔다. 미래창조과학부와 고용노동부는 논란이 점화될 때마다 해결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 논의가 진행된 바 없다.

발단은 지난해 10월 미래부의 적극적인 유권해석이다. 미래부는 건물외벽·옥상·전봇대 등에서 하는 공사는 '경미한 공사'로 분류할 수 없다며 케이블·통신업체 기사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밖에 없다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경미한 공사’가 아니라면 ‘기간통신사업자(원청)’나 ‘정보통신공사업 등록을 한 사업자’가 직접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급 기사 한 명을 정보통신공사업 등록을 한 사업자로 볼 수 있을까. 그러려면 그는 개인사업 자본금 1억5천만원 이상과 기술계 정보통신기술자 3명 이상, 기능계 정보통신기술자 1명 이상을 갖추어야 한다. 기술자들이 상주할 수 있는 사무실도 구비해야 한다. 당장 한 달 봉급을 벌기 위해 센터문을 두드리는 현장 기사들에겐 너무 먼 조건이다.

‘노조 죽이기’ ‘전원 불법 비정규직’ 악덕업자부터 처벌해달라

서울시의 조사 소식이 알려진 후 현장 기사들 사이에선 '악덕기업부터 벌해달라'는 요구가 나왔다. 대표적인 업체가 서울 강북지역 LG유플러스 통신설비 설치·수리를 위탁받은 '(주)누리온정보통신(박종수 대표이사)'이다. LG유플러스비정규직노조(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가 서울시에 표적 감사를 요청하는 업체다.

▲ '일감 삭감' 생계 탄압 비판하는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조 피켓. 사진=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비정규직 지부
▲ '일감 삭감' 생계 탄압 비판하는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조 피켓. 사진=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비정규직 지부

누리온은 LG유플러스 통신기사들 사이에선 '노조 말려죽이는' 센터로 통한다. 박종수 대표이사는 이들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조합원만 골라 '살인적으로' 일감을 줄였다. 평균 230만원은 넘던 월급이 100만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2년 반 여 년이 지났다. 45명에 달했던 조합원은 결국 0명이 됐다.(관련기사 임금 40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잔인한 노조 말살 전략)

누리온의 통신기사들은 모두 도급기사다. '정규직'이었던 조합원이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한 빈 자리를 '프리랜서' 기사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누리온은 2015~2016년 동안 정규직 기사들을 괴롭히거나 회유해 전원 퇴사·재계약을 유도해냄으로써 정규직의 씨를 말려버렸다. 2016년 9월, 끈질기게 버티던 남은 정규직 한 명의 퇴사와 함께 누리온은 '전원 도급 기사 사업장'이 됐다.

누리온은 "노조 주장은 왜곡"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노조가 지난해 2월15일부터 지금까지 26건의 채용공고를 전수 조사한 결과 새로 입사한 기사 전원이 '프린랜서'로 뽑혔다.

누리온 도급기사가 처한 열악함은 전직 누리온 기사가 밝힌 바 있다. 누리온 출신 전직 기사 A씨는 노조 측에 "4대보험은 원하는 기사들에 한 해 배려 차원에서 들어주는 것일 뿐 정규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라며 "연차휴가, 연차수당, 퇴직금이 없다. 주휴일이나 주휴수당, 5.1 노동절 유급휴일도 없고 해피콜(고객확인전화) 점수 안 좋게 나오면 멀티기사 임금체계 중 A/S부분 수수료에서 차감한다"고 밝혔다. A씨는 노조 탈퇴 후 도급기사로 재고용된 직원으로 누리온은 탈퇴 당시 '노조 가입 안한다'는 각서를 받아갔다.

LG유플러스비정규직 노조는 서울 강북·성북 지역 단체들과 누리온퇴출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누리온 기사들을 직접 찾아가 노조 가입을 홍보하고 지역 주민의 퇴출 서명을 독려하고 있는 중이다.

정부 외면 속, ‘다단계 하도급’ 악습 누군가는 끊어줘야

LG유플러스 현장 기사들이 ‘악덕기업’을 겨냥한 이유는 또 있다. 서울시의 실태조사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장준 희망연대노조 정책국장은 “전담팀에 인력이 적은 것으로 아는데 등록된 곳만해도 수십개인데 전수조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심사는 제대로 될 지 우려가 든다”면서 “제대로 된 현장조사가 한 두곳 밖에 되지 않으면 차라리 누리온 같은 문제업체부터 실사하고 행정조치해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직부장 서광주지회 강세웅(46세),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팀장 인천계양지회 장연의(42세) 조합원이 2015년 2월 초순 새벽 진짜 사장 LG, SK그룹에 장기 파업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 도심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직부장 서광주지회 강세웅(46세),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팀장 인천계양지회 장연의(42세) 조합원이 2015년 2월 초순 새벽 진짜 사장 LG, SK그룹에 장기 파업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 도심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서울시가 주요하게 감시할 사항은 4가지로 압축된다. △해당 도급기사가 정보통신공사업자인지 △업체가 자격갖춘 사업자에 도급을 줬는지 △도급규모가 전체 도급공사의 절반을 초과하는지 △도급기사 고용시 원청이 서면으로 승낙했는지 등이다. 대부분 위반되고 있는 사항이다.

서울시는 각 센터가 무자격자에게 정보통신공사를 맡겼다면 고발조치를 취해야 한다. 대부분 도급기사들이 ‘정보통신공사업자’가 아닌 이상, 도급 기사를 고용한 대부분의 센터가 고발대상에 해당될 것이다. 정보통신공사업법 제29조를 위반한 데 따라 위반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정보통신공사업법 제31조는 “공사업자(센터)는 도급받은 공사의 100분의 50을 초과하여 다른 공사업자에게 하도급을 해서는 안된다”고 정한다. 이를 위반하면 서울시는 시정조치를 하거나 영업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원청에 책임을 물을 근거 조항도 있다. 동법 31조는 공사업자(센터)가 공사를 도급할 때 발주자(원청)의 서면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정한다. 원칙에 따르면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원청이 협력업체의 고용·도급상황을 감독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원청은 원하청간 업무 보고 체계 상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시에도 서울시는 시정명령 및 영업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박 정책국장은 “전수조사는 이미 된 상태”라며 “업체가 서울시에 자료만 잘 내놓으면 자료조사는 빨리 끝난다”고 지적했다. 해당 업체들이 서울시의 조사 협조 요청에 얼마나 성실하게 임할 지는 미지수다.

서울시는 오는 31일까지 30개 협력업체 및 5개 원청 기업에 ‘실태조사 자체 점검표’를 받는다. 이후 6월까지 서면·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서울시는 점검 결과에 따라 과태료, 영업정지, 등록취소 등 행정처분 및 사법기관 고발 등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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