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얌전하고 조용하다. 8년 전 ‘박연차 게이트’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던 조선일보가 ‘박근혜 게이트’ 앞에서는 부쩍 차분하다. 비선실세가 국정 전반에 개입해 국가를 농단했고 그로 인해 대통령이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됐는데도 이 신문의 논조는 8년 전과 많이 다르다.

조선일보는 15일 사설을 통해 “검찰은 수사를 하더라도 예우를 갖추고 최대한 신속하게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8년 전에는 “검찰이 여기서 수사를 접어버린다면 대한민국 검찰은 애쓴 보람도 없이 ‘죽은 권력만 손대는 하이에나 검찰’이란 소리를 또 한 번 듣게 된다”(2009년 4월6일 사설)며 끝장을 보자고 했다. 노무현과 박근혜에 대한 이중잣대다.

“노무현을 이 땅의 정치에서 지우자”(2009년 4월27일자 김대중 칼럼)라며 분노했던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도 “그만큼 했으면 분이 풀릴 만도 한데 그(박근혜)를 굳이 법정에 세우는 것은 대선에도 안 좋고 나라 안정에도 안 좋다”(2017년 3월14일자 김대중 칼럼)고 주저하고 있다.

▲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2017년 3월14일자(위), 2009년 4월27일자(아래)
▲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2017년 3월14일자(위), 2009년 4월27일자(아래)
언론은 권력 비판과 감시가 사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과 관련해 검찰과 언론은 ‘망신주기 검찰 수사’와 ‘받아쓰는 언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비판은 언론의 사명이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 조선일보가 매일같이 쏟아냈던 보도의 적절성에 대해 이 지면에서 가타부타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신문이 “대통령과 대통령 일족의 뇌물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 시스템을 분해 청소하는 자세로 철저히 대점검하는 것”(2009년 4월30일 사설)을 주문했던 것처럼 검찰이 어떻게 부패 권력을 수사해야 하는지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을 통해 복기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면 “지금 국민들은 대한민국 법률의 엄정함을 보이고 최고 권력자 일족의 윤리적 타락의 실상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현재의 권력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면서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신을 더 이상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2009년 4월24일 사설)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는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다. “이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자신의 비리였다. 대통령은 다른 모든 공직자들이 본분을 벗어나지 않고 국민을 위해 올바로 일하도록 감독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그 최고 감독자가 탈선을 해버리면 나라 시스템은 원천적으로 작동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2009년 4월15일 사설)

검찰이 박근혜씨를 수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메스를 든 의사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의사가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하다 말고 상처를 덮어 꿰매버리면 그 상처는 안으로 곪아 들어가게 마련”이고 “그러면 검찰은 정권이 끝날 때마다 전 정권 사람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2009년 4월6일 사설)

▲ 조선일보 2009년 4월6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09년 4월6일자 사설.
박근혜는 파면됐기 때문에 ‘과거’가 됐지만 차기 권력이 부재하고 ‘박근혜 인사’가 국정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보면 ‘현재’다. 특검이 출범하기 전 검찰은 살아있던 권력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박근혜 정부 핵심 실세는 도마 위에 올리지 못했다. 뇌물죄 적용도 하지 못했다. 검찰은 명예회복할 기회를 다시 부여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검찰은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곪은 종기를 터뜨려 새살이 돋을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검찰의 속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 이 꼴이 돼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이란 데 자존심 대신 모멸감을 느끼게 된 것은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의 부정과 불법을 현장에서 단죄하지 못하고 번번이 정권이 수명을 다한 다음에야 사정의 칼을 드는 용기없는 처사를 되풀이했기 때문이다.”(2009년 4월7일 사설)

또한 검찰이 조기 대선 국면을 이유로 정치적 계산을 해선 안 된다. “국민도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추문을 한 달 넘도록 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참담할 수밖에 없다.” “검찰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해가며 수사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할 게 아니라 당당하고 단호하게 수사를 밀고 나가 가급적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청사를 드나드는 광경을 또다시 보게 되는 국민은 착잡하다. 검찰은 이런 국민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2009년 4월22일 사설)

▲ 조선일보 2009년 4월7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09년 4월7일자 사설.
아울러 “검찰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공식 계통이든 사적 경로든 정권 측에 수사 상황을 보고하지 않는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권력에 보고하고 지침을 받으면서 그 권력을 수사할 수는 없다.”(2009년 4월7일 김홍진 논설위원 칼럼) “어떻게든 ‘대통령 부패’라는 대한민국 고질병을 끊을 수 있는 수술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2009년 4월13일 사설)

박근혜씨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런 나라의 고통, 가정의 비극, 세계의 웃음거리를 부르고 만들어내고 말았을까.(중략) 자신들의 행위를 국민의 눈과 법률의 감시로부터 가려주는 ‘권력의 가림막’이 영원한 듯 착각한 모양이다.”(2009년 4월13일 사설)

현재 국민들은 박근혜씨가 “탄압받는 약자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모종의 법정 드라마를 준비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2009년 4월24일 사설)

“분노한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진실 그대로 국민 앞에 서는 것”이나 박근혜씨는 “임기 내내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는 모습을 국민 앞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검찰 소환을 앞두고 다시 대한민국 법률을 자신의 허물을 가리는 방패로 이용할 궁리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을 한 번 더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다.”(2009년 4월9일 사설) “전직 대통령이라면 과거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진실을 행동과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2009년 4월14일 사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30일 검찰에 출두했다. 이날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2009년 4월30일은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날”이라고 썼다. 2009년 4월 한 달 동안 조선일보 지면은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연루된 비리 의혹으로 도배가 됐다. 사설은 독설로 가득했다. 그때의 독설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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