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민심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만을 이유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재는 국회가 요청한 탄핵사유를 5가지로 정리했다. 이 중 공무원 임면권 남용, 언론 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 의무와 성실한 직책수행 의무 위반 등 3가지를 파면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헌재가 보수적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번 국면에서 국민들은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분노가 극에 달했다. 헌재는 이 부분만 파면사유로 인정했다. 그 외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해선 근거가 부족하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이유로 파면사유에서 제외했다. 물론 국회가 탄핵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한몫했다.

박근혜 탄핵 결정은 역사적인 결과다. 멈췄던 대의제가 작동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국회와 헌재를 움직였던 촛불은 그 기관들을 뛰어넘어 유례없는 에너지를 냈다. 매주 광화문 광장에선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낱낱이 전시됐고, 각종 피해자들이 거리에 나왔다. 정부에 상처받은 노동자, 농민, 학생,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시민들이 넘쳐났다. 이들의 목소리는 국회에서 한번 걸러져 탄핵사유들로 압축됐고, 헌재에서 또 한 번 걸러졌다. 법은 민심과 여전히 거리가 있다.

▲ 지난해 12월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소심판정에서 준비절차를 전담하는 수명 재판관인 이진성(왼쪽부터), 이정미, 강일원 재판관이 공개심리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첫 준비기일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지난해 12월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소심판정에서 준비절차를 전담하는 수명 재판관인 이진성(왼쪽부터), 이정미, 강일원 재판관이 공개심리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첫 준비기일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헌법과 헌재의 차이

헌재결정문은 헌법과 온도차가 느껴진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면, 헌재는 대통령이 세월호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고 재빠르게 대처했다면 승객을 구조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헌재는 결정문에서 “대통령의 대응조치에 미흡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고 해 곧바로 대통령이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헌재는 “대통령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는 헌법적 의무에 해당하지만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와는 달리 규범적으로 그 이행이 관철될 수 있는 성격의 의무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단임제 대통령이라 법적·정치적으로 책임질 방법이 없고 다만 성실의무 위반 여부가 여당에 정치적 불이익으로 남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헌법 제10조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헌재는 국민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물론 차기 대통령이 생명권 보호의무를 지켜야한다는 보충의견을 달았지만 처벌사유에서 빠진 이상 대통령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처벌받지 않은 실책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 지난해 4월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4월 16일의 약속국민연대 관계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및 특검 실시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지난해 4월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4월 16일의 약속국민연대 관계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및 특검 실시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재벌을 피해자 입장으로 규정지은 것도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이다. 헌재는 “미르와 K스포츠재단 설립과 관련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사항은 거의 없었다”며 “전경련에서 정해 준 금액을 납부하기만 하고 재단 운영에는 관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통령의 재정·경제 분야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과 영향력, 비정상적 재단 설립과정과 운영 상황 등을 종합하여 보면 피청구인으로부터 출연 요구를 받은 기업으로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담과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필요성을 느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을 간절히 바랐던 국민정서와 상당히 동떨어져있다. 이처럼 사법기관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경우 국민의 뜻이 왜곡될 수 있다.

정치문제를 사법영역으로 가져가면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헌재는 공무원 임면권 남용에 대해 “대통령이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을 면직한 이유나 대통령비서실장이 1급공무원 6인으로부터 사직서를 제출받도록 지시한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유라 승마대회에 대통령이 신경 썼고 이후 맘에 드는 감사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문체부 노태강, 진재수 공무원에 대해 인사조치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정황상 인사권자의 사적인 이유로 벌어진 부당한 인사 조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파면사유에서 제외됐다.

헌재는 언론자유 침해 관련해서도 “대통령이 세계일보 정윤회 문건보도에 비판적 입장을 표명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입장 표명만으로 세계일보의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박근혜의 통치 스타일을 고려할 때 정치적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헌재는 법적책임을 묻지 않았다.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국민의 정당한 표를 얻은 멀쩡한 정당을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수명 다한 담론을 꺼내와 해산했던 헌재였다. 김영한 청와대 전 민정수석의 메모에는 헌재 선고일정까지 적혀있고, 정당해산 결정문에 오류를 스스로 인정했던 헌재였다. 위헌정당해산제도를 정당 활동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색깔론 확산에 악용했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헌법정신에 맞다고 보는 헌재다. 성문헌법체제에서 ‘관습헌법’을 끌어와 정부 정책에 맞서기도 했다. 그런 헌재가 박근혜 탄핵결정으로 면죄부를 받았고, 재판관들은 시민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국민에게 견제 받지 않는 법전문가들로 구성된 헌재는 언제든 다시 강자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곳이다.

헌법을 법으로 보완하는 작업 필요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몰아낸 역사를 기록했지만 동시에 박근혜 정부를 경험한 시민들의 기준치는 낮아졌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배고픈 시절을 경험한 세대 중 다수는 ‘그래도 지금이 그때보단 낫다’는 기준으로 한국사회를 판단하고 있다. 현재 유력 대선후보들은 뭘 해도 박근혜 정부보단 나을 가능성이 많다.

헌법과 민심의 괴리를 더는 헌재가 채워줄 수 없다. 시민들이 광장에 지속적으로 나가 권력을 향해 외칠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 불신을 기초로 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들이 탄핵국면에서 할일은 개헌이 아닌 헌법정신을 구체적으로 입법하는 과정이다. 박근혜 파면은 헌법에 규정된 내용이 제대로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법에 따라 정부가 집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헌재가 정치적 판단이거나 모호하다며 판단을 미뤄둔 헌법조항들을 국회의원들이 현실화해야 한다. 앞으로 법전문가들에 의한 법 해석(사법) 투쟁이 아닌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을 통한 입법화가 필요하다. 대통령 후보들은 선명하게 자신의 정책방향을 밝혀 어떻게 헌법을 실현할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각 캠프에서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과 그들이 각각 국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실현할지 투명하게 공개한 뒤 심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좀더 섬세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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