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정미는 ‘탄핵심판’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주문’을 낭독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재가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 헌법에 따라 위임한 재판권 행사를 통해 ‘파면’을 선고한 바로 그 순간부터 박근혜는 대통령직을 박탈당한 채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해온 80% 안팎의 국민은 그가 당연히 “헌재의 판결을 승복한다”고 언론에 밝힌 뒤 즉시 청와대 관저를 떠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청와대 ‘참모’라는 사람들에게 “헌재의 탄핵 결정이 정말이냐”고 물어본 뒤 입을 굳게 다문 채 만 이틀이 훌쩍 지나도록 주권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4년 동안 ‘국가원수’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최순실과 함께 국가를 파탄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헌재로부터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고도 후안무치하게 ‘나는 모르쇠’ 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박근혜는 헌재가 파면 선고를 내린 순간에 그저 자연인이 된 것이 아니라,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라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해 ‘불소추특권’을 박탈당했다. 검찰의 특별수사본부는 바로 그 시간 이후 언제라도 박근혜를 체포해 신문한 뒤에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요일인 12일 저녁까지 박근혜가 청와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들어서야 박근혜가 삼성동 ‘사저(엄밀히 말하면 자택)’로 돌아갈 수 있도록 트럭들이 이사 짐을 나르는 장면이 TV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주권자들을 향해 단 한마디의 ‘사죄’나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저녁 7시 20분께 청와대를 나섰다. 청와대 경호실 소속의 차량과 오토바이들이 에워싼 가운데 삼성동 집 앞에 도착한 박근혜는 골목에 들어찬 수백명의 지지자들에게 마치 ‘개선장군’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는 최경환, 윤상원, 김진태, 조원진 등 ‘골수 친박 의원’들과 악수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자유한국당 의원 민경욱이 박근혜를 대신해 짤막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 못해 죄송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께 감사하고 이 모든 결과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박근혜는 예의를 갖추어 국민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형식을 아예 무시해버린 것이다. 그의 일방적 메시지는 헌재의 ‘파면 선고’를 승복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임이 분명하다. 특검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범죄 사실들을 입증했는데 그가 그것을 뒤엎기 위해 밝힐 수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박근혜는 최순실과 함께 저지른 국정농단 때문에 대통령 자리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국가원수 자격 없음’이 만천하에 선포된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박근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과 법치주의를 지킬 수 있는 자격과 의지가 있는가? 파면 선고 이후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56시간 동안 그가 저지른 ‘작태’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시민이라도 헌재가 선고를 하면 일단 승복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파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불복’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일까?

박근혜가 헌재의 파면 선고 뒤 사흘 동안 청와대 관저에 머문 것을 너그러이 보아주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일개 자연인으로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이사 준비가 될 때까지만 여기 있을 테니 국민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시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염치와 예의가 없는 사람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박근혜에게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나 연민이 없다는 사실도 이번에 확연히 드러났다. 지난 10일 오전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직후 헌재 부근에서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70대와 60대 중반의 노인 3명이 크게 다쳐 2명은 그날, 다른 1명은 이튿날 사망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박근혜는 당연히 “저 때문에 참사를 당해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대수롭지 않게 보였기 때문인지 박근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기야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 희생된 때도 ‘악어의 눈물’을 흘렸던 그의 입에서 따뜻한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정미가 지난 10일 낭독한 탄핵심판 선고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희 재판부는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이뤄지는 오늘의 이 선고가 더 이상의 국론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치유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와 정반대 길로 치달았다. 그는 청와대를 ‘무단 점거’하거나 ‘주거 침입’을 했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리인단의 변호사와 ‘박사모’의 헌재 규탄을 ‘즐기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님이 비록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억울하게 잃었지만, 그보다 값진 법치 애국의 영원한 순교자가 되셨다.”(변호사 김평우) “어제 헌재의 탄핵은 역모였고 반란이었다.”(박사모 회장 정광용)

헌재의 ‘파면 선고’ 이후 박근혜가 보인 행태를 보면 두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후안무치(낯이 두터워 부끄러움을 모름)’와 ‘무도(無道):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됨)’가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대다수 국민은 그의 후안무치하고 무도한 언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검찰은 한 시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국정농단의 증거들을 수집한 뒤 박근혜를 구속하고 엄중히 수사해야 한다. 특검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라서만 기소해도 박근혜는 장기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 70만여명이 모인 20차 촛불집회에서 뜨겁게 울리던 함성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잘 가라 박근혜, 최순실 옆방으로!”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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