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파면 결정 불복한 박근혜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박근혜씨가 지난 12일 밤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사저에 도착한 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을 통해 전한 메시지다. 박씨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직 파면 결정 후 침묵을 거듭하다 측근을 통해 사실상 헌재 판결에 불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일각에서는 박씨의 말을 향후 검찰 수사 및 형사 재판 과정에서 강력한 법적 투쟁에 나설 것임을 시사한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박씨가 사저 앞에 도착한 뒤 밝은 표정으로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사저 안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사저 안에서 박씨를 만나고 나온 민경욱 의원은 “박 전 대통령께 힘내시라고 말씀을 드리니 ‘알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13일자 중앙일보 1면.
13일자 중앙일보 1면.
조선일보는 “박씨는 청와대를 떠나기에 앞서 관저에서 수석비서관들과 티타임을 가진 뒤 녹지원에서 직원 500여 명과 인사를 나눴다”며 “일부 수석 및 직원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날 오후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간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사저 앞에는 친박계 '맏형'인 자유한국당 서청원 의원을 비롯해 최경환, 윤상현, 조원진, 이우현, 박대출, 김진태, 민경욱 의원과 이원종, 이병기, 허태열 전 비서실장, 김관용 경북지사, 전광삼 전 청와대 춘추관장 등이 모였다.

서청원 의원은 “대통령님께 ‘힘내시고 건강 잘 챙기시라’고 했고, 박 전 대통령은 ‘바쁜데 나와주시고 항상 힘이 돼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서 의원 측이 전했다. 민 의원은 이날 모인 친박계 인사들의 추천으로 박 전 대통령 ‘사저 대변인’ 역할을 맡기로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이선우 청와대 의무실장과 윤전추 행정관 등이 사저 내부에서 박씨를 도왔고, 2007년부터 박씨를 근접 경호했던 이영선 행정관도 경호팀에 공식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박씨가 관저에 머무는 것을 두고 야권에서 ‘헌재 판결에 승복하고 관저에서 빨리 나오라’는 비판 여론이 나온 것도 이동을 서두른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됐다”고 설명했다.

▲ 13일자 조선일보 3면
▲ 13일자 조선일보 3면
“박근혜 불복은 대한민국 체제 부정 반헌법 행위”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삼성동 현장의 친박계 의원들도 “승복 의사를 밝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없었다”고 답했다. 이처럼 사실상 헌재 결정에 불복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 언론들은 박씨가 일부 지지층에 기대 적극적으로 법적 투쟁에 나설 계획을 시사한 것이라며 일제히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13일 “박근혜의 불복… 나라 두 동강 내려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는 헌재 결정에 사실상 불복을 시사하고 자유한국당을 접수해 검찰·야권과 대결정치를 하겠다는 결기만 가득했다”며 “헌재의 탄핵 결정에 노골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지지층을 결집해 검찰에 ‘위력 과시’를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수사의 예봉을 꺾겠다는 속내가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2004년 헌재가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박씨가 했던 발언을 언급하며 박씨가 자신의 과거 발언도 잊어선 안 된다고 질책했다. 당시 박씨는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고 말했다.

▲ 13일자 중앙일보 사설.
▲ 13일자 중앙일보 사설.
한겨레는 “승복과 통합 대신 갈등과 분열의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불길한 메시지”라며 “탄핵당한 대통령의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매우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한때 국가 지도자였다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고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승복과 통합을 밝혀야 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시위가 폭력화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데도 ‘불복’의 메시지로 반발을 ‘선동’하고 지지자들을 계속 끌어모으려 하고 있다”며 “무책임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헌법 수호의 의지는커녕,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반헌법적 행위다. 헌정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한국일보도 “박 전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박사모 등 극렬 지지층의 시위 과정에서 3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며 “일각에서 박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과격 시위를 자신의 수사를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배경”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일보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정 혼란을 초래한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국민에 사죄하는 게 도리”라면서 “.박 전 대통령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헌재 판결을 인정하고 정국 수습과 국민 통합을 위한 노력에 협조해야 한다. 검찰 조사에도 성실하게 응하는 것이 옳다”고 당부했다.

폭력으로 얼룩진 친박집회

한편 이날 날 삼성동 사저 주변은 박근혜 지지자 1000여 명(경찰 추산)과 수백 명의 내외신 취재진, 그리고 경찰 10개 중대 1000여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사저 인근에서 일본과 대만의 언론들은 박씨의 귀가를 생중계를 하기도 했다.

서울신문에 보도에 따르면 이날 박근혜 지지자들은 오후 12시부터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좌파가 박 전 대통령에게 계란을 던지러 왔다’며 시민들의 가방을 뒤지거나, 취재를 하는 기자들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지지자들은 청와대 문건이 담긴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태블릿PC를 처음 보도한 JTBC 취재진에 거친 욕설을 내뱉는 등 사저 인근에 진을 친 기자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반면 주변에 사는 한 주민은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사저 바로 뒤에 초등학교가 있고 주변도 주거지역인데 매일 오늘처럼 시끄러워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지지자들 언행이 과격해지면서 인근 주민과 마찰도 발생했다”며 “‘집회 신고도 안하고 주말에 몰려와서는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냐’고 사저 앞 주택에 살고 있는 이모(65)씨가 항의하자 지지자들이 ‘빨갱이’라며 몰려들어 싸움이 발생할 뻔 했다”고 전했다.

사저를 지나가던 주민 안모(46)씨는 “지지자들이 탄핵된 거에 분노하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죄다 몰려와서 신고하지도 않고 상가를 점거하고 마이크로 시끄럽게 하는 건 불법 아니냐”고 항의했다. 주민 정모(34)씨는 “평화롭던 동네가 아수라장이 됐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탄핵으로 갑자기 대통령이 돌아오게 되면서 동네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고 토로했다.

▲ 13일자 세계일보 11면.
▲ 13일자 세계일보 11면.
앞서 박씨가 파면된 뒤 열린 11일 첫 주말집회는 탄핵 찬반단체들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갈렸다. 촛불집회는 차분한 분위기와 환호 속에 4개월여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반면 탄핵 반대 친박집회는 헌재 결정에 불복하며 또 다른 투쟁을 예고했다. 폭력 집회도 이어갔다.

세계일보는 “촛불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한 참가자들은 박 전 대통령이 아직 청와대에서 나오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감옥으로 들어가라’ 등 구호를 외쳤다”며 “집회에서는 헌재 선고 이후 탄핵 반대집회 참가자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3명이 숨진 데 대해 조의를 표하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친박단체들로 구성된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 총궐기 운동본부’(국민저항본부)는 이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제1차 탄핵무효 국민저항 총궐기 국민대회’를 열고 불복을 선언했다. 헌재가 박씨의 파면 사유에서 세월회 참사를 제외한 것을 두고 “여행 가다 사고난 배 사건으로 대통령을 물고 늘어졌다”고 주장했다.

세계일보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 중 일부는 휘발유 통을 들고 와 경찰과 취재진, 행인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며 “한 참가자는 서울 태평로파출소 인근에 트럭 한 대를 세워놓고 ‘전날 태극기집회에서 경찰 잘못으로 3명이 숨졌다. 남대문경찰서장을 만나게 해 달라’면서 휘발유 통 뚜껑을 열어 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일 듯이 위협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검찰, 이르면 이달 중 박근혜 소환

박씨의 조사를 준비 중인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휴일인 12일에도 기록 검토 작업을 이어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검찰에 넘긴 수사기록에다 지난해 10~12월 1기 특수본에서 작성한 기록을 합치면 모두 수만 쪽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신문은 “지난 10일 파면된 박 전 대통령 수사가 최우선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법조계는 전망하고 있다”며 “여러 전망 중 이달 박 전 대통령 조사를 진행하고, 늦어도 대선이 있는 5월 이전인 다음 달에는 기소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라고 밝혔다.

특수본은 향후 수사 진행에 대해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기록 검토 중”이라며 구체적인 수사 계획 등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라고 전했다.

▲ 13일자 경향신문 4면.
▲ 13일자 경향신문 4면.
경향신문은 “이 때문에 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찰이 오는 5월 선출될 차기 정부에 선택권을 주기 위해 ‘숨고르기’를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면서 “국민 화합 차원에서 불구속 기소 등의 선택권을 차기 정부에 주는 것이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차기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도 대선 전 속전속결 처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선이 끝날 때까지 수사를 미루자는 말도 나오지만 박 전 대통령은 후보가 아니므로 수사를 미룰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검찰의 속전속결 수사를 전망하는 이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여론을 근거로 꼽았다. 파면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을 즉각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높기 때문”이라며 “또 지난해 11월 공범으로 기소된 최순실씨 등의 재판이 절반 이상 진행됐고, 뇌물공여자로 지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도 곧 본격화하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한 한 빨리 기소할 필요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만약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거부하면 ‘법과 원칙’에 따라 체포영장 청구 등 강제수사를 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김수남 검찰총장은 지난 10일 “법과 원칙에 따라 검찰 본연의 임무를 의연하고도 굳건하게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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