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파면 선고를 내린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 중 하나였던 생명권(헌법 제10조) 보호 의무 위반까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등을 다 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 의무를 현저히 위반했지만 파면할 정도까진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은 이날 선고문에서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는지 여부는 탄핵 절차 심판 절차 판단 대상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헌재 “세월호 사고 참혹하기 그지 없지만”)

대통령이 헌법상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성실’의 개념이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같은 추상적 의무 규정의 위반 이유로 탄핵 소추를 하기엔 어렵다는 설명이다.

헌재는 이날 세월호 참사 관련 소추사유에 관한 보충의견(재판관 김이수·이진성)을 통해 “박 대통령이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했으나 이것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등에 관련된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한 경우 대통령은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해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므로 이에 대한 그 불이행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

다만 박 대통령은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의무를 위반했지만 구체적 법률을 위반했다고 인정할 자료가 없고, 직무를 의식적으로 방임하거나 포기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 3월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선고기일에 참석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3월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선고기일에 참석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에 대해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해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헌재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된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대응은 지나치게 불성실했다”며 “이는 헌법 제69조 및 국가공무원법 제56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 측은 헌재 변론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오후 1시7분경과 1시13분경 ‘190명이 추가 구조돼 총 370명이 구조됐다’는 내용의 보고를 받아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헌재는 “박 대통령이 위 보고를 받았다 하더라도 104명의 승객이 아직 구조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므로 상황이 종료됐다고 판단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박 대통령은 늦어도 오전 10시경에는 세월호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했거나 조금만 노력을 기울였다면 인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돼, 오후 3시에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또 “국가위기 상황의 경우 대통령은 즉각적인 의사소통과 신속한 업무수행을 위해 청와대 상황실에 위치해야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사고의 심각성 인식 시점부터 약 7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있으면서 전화로 원론적인 지시를 했다”며 “위기에 처한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심도 있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 10시15분과 10시22분 국가안보실장에게, 10시30분 해경청장에게 전화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헌재는 “통화기록을 제출하지 않았으므로 위와 같은 통화가 실제로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당시 해경청장은 9시53분경 이미 특공대 투입을 지시했다는데 대통령이 실제로 해경청장과 통화를 했다면 같은 내용을 다시 지시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해경청장에 대한 특공대 투입 등 지시를 인정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 2014년 4월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긴급 방문했다. 사진=청와대
▲ 2014년 4월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긴급 방문했다. 사진=청와대
헌재는 이어 “국정 최고책임자의 지도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국가위기가 발생해 그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를 통제·관리해야 할 국가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라며 “세월호 참사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박 대통령은 그날 저녁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집무실에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재난이 발생하였는데도 그 심각성을 아주 뒤늦게 알았고 이를 안 뒤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언론의 자유(헌법 제21조 제1항) 조항을 위배했다는 탄핵 사유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지난 2014년 11월 세계일보가 청와대 비선실세 관련 이른바 ‘정윤회 문건’을 보도하자 압력을 행사해 세계일보 사장을 해임했다는 게 국회 탄핵소추위원회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세계일보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실에서 작성한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사실과 박 대통령이 이 보도에 대해 ‘청와대 문건 외부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이고, 검찰이 철저히 수사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문건 유출을 비난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그러나 이 사건에 나타난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세계일보에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행사했는지 분명하지 않고 박 대통령이 관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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