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철학 공부를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우연히 철학 동아리를 알게 되어 가입했다. 동아리에서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다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이미 주요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기에 큰 거부감 없이 공부했다. 통일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와 북한의 체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북한의 사회, 경제적 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기들과는 달리 그런 것까지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었다. 개인 홈페이지에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한 ‘공산당 선언’ 전문을 그대로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느즈막이 군대에 가야했다. 이왕 가는 거 리더십 훈련도 받고, 강한 군대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어서 해병대 학사장교에 자원했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강화도에 배치되었다. 북한을 마주보고 있는 분단의 최전선에서 성실히 근무하며, 휴일과 휴가 때에는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으며 지냈다.

너 우리가 올 줄 알았지?

2011년 4월 어느날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오전 회의 시간에 부대에 기무부대 차량 두 대가 들어왔다. 기무사령부 소속의 L소령은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위반 혐의가 적힌 압수수색영장을 내밀고, 김 중위의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말했다. “너, 우리가 올 줄 알았지?” 김 중위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기무부대 수사관 두명은 김 중위의 사무실과 영내숙소에 들어가서 장갑을 끼고 곳곳을 수색하더니,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떼고, 노트북, 일기장, 책 등을 압수했다. 같은 시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서울 집에서도 기무부대 수사관이 갑자기 찾아가서 김 중위의 책 30여권 등을 압수했다. 그로부터 열흘동안 기무부대에서 매일 10시간이 넘는 조사가 진행되었다. 능숙해보이는 기무부대 수사관은 압수물품들에 대한 사실 관계부터 김중위의 과거 여러 기록과 행적 그리고 군대와 근현대사, 마르크스 사상,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생각, 국보법에 대한 인식 여부까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수사는 짜여진 각본이 있는 것처럼 매일 정해진 진도 범위가 있는 것 같았다. 김 중위가 비협조적인 태도와 불성실한 대답을 하면, 수사관들은 “그렇게 하면 나중에 불리하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게다가 기괴한 논리로 김 중위가 군대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해석을 강요했다. 김 중위는 자신을 애초부터 피의자로 낙인 찍으며 진행되는 조사가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잘 나오던 후식이 끊기고, 대대장을 통해 “결국 도와주려는 거니까 수사에 잘 협조하라.”는 압박이 있었다. 수사 종료 사흘 전, 수사관 책상에서 우연히 보게 된 공문에는 “고려산 공작사건 용의자 사법처리 가능성 검토”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고려산은 김 중위의 부대가 위치한 산의 이름이었고, 기무부대의 목적은 김 중위의 사법처리였다.

살벌했던 기무부대 조사가 끝나고, 석달 후에 군검사 조사가 시작되었다. 검사의 조사 내용은 기무부대에서 조사한 내용들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기소가 되기 전이었는데 가족들이 크게 걱정해서 군법무사령관 출신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는 빨갛게 덧칠해진 김 중위의 사상과 언행을 거의 인정하면서, “피고인이 현재 철저히 반성하고 있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변호했다. 1심 군사재판은 증인 신문 없이 사실 관계만 파악하고 간단명료하게 종료되었다. 두 달 후에 선고 공판이 열렸고, 재판관은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 <김일성 혁명업적, 마르크스의 사상, 맑스 저작선집, 청년을위한한국현대사> 서적 몰수”를 선고했다.

무죄가 아니었다. 군사법원의 한계는 확고했다.

무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집행유예도 법적으로는 유죄 판결이기 때문에, 김 중위는 군인사법에 따라 곧바로 휴직되었다. 당연히 항소를 결정하고, 이제부터는 재판부에 선처를 구할 것이 아니라, 무죄를 적극적으로 다투기로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소개받은 이 변호사는 김 중위에게 사건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직도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믿을 수 없다”며 크게 분노했다. 이 변호사와 김 중위는 항소심 군사재판에서 피고인의 경력을 ‘좌편향적’으로만 보지 말 것, 이적표현물로 인정된 서적들을 소유하고 학습한 목적에 이적 의도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책의 내용 중 일부는 북한을 찬양하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기본 질서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적 주장에 힘을 보태기 위하여 각 서적을 집필하거나 번역한 교수님들과 학자들에게 진술서와 의견서를 여럿 받았다. 게다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북한에 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 두 명이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전투적으로 증언했다.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했던 혁명, 투쟁에 대한 단어 해석과 북한을 과연 반국가단체로만 볼 것인가에 대한 쟁점이 뜨거웠다. 변론 과정에서 분위기가 우세했고, 수많은 국보법 무죄 판결 선례에 비추어 자신감도 커져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소심 선고문은 1심과 같았다.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 그나마 김일성 혁명업적 서적 외에 다른 서적 및 자료에 대한 유죄는 모두 기각되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군사법원의 한계가 확고했다. 군사법원이 아닌 대법원 상고심까지 가서 끝까지 무죄를 받아내기로 했다. 상고이유서에서 김일성 서적 취득과 소지 자체를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 김 중위는 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와 관련도 없고 이적 목적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이를 인용하여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시켰고, 군사법원에서 마침내 그토록 듣고 싶던, 기필코 들어야 했던 결과를 들었다. “피고인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한다”

70년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7,80년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2011년에 시작되어 2014년에야 마무리된 일이다. 엄혹하고 암흑한 군사독재 시절에 국보법은 ‘막걸리법’이라고 불렸다. 막걸리 마시는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정부 비판을 하다가 국보법이 적용되어 잡혀갔다는 일화에서, 또는 ‘막’ 걸면 걸린다는 특성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헌법에 보장된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 배치되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하며, 모호한 법조항에 따른 자의적인 법 해석이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국보법은 제정 당시부터 그 피해가 막심했다. 시행 한 해 동안에만 118,621명이 검거․투옥되었고, 132개 정당, 사회단체, 언론기관이 해산당했다. 5~6공 기간과 문민정권 기간인 1980년에서 1996년까지 국보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4,196명이었다. 이 기간에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과 관련된 수많은 조작사건이 있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국보법 적용은 이전 민주정부의 남북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반동적 성격이 짙고, 건수도 훨씬 많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보법 적용 입건 건수는 2005년 33건, 2006년 35건, 2007년 39건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2008년 40건, 2009년 70건, 2010년 151건, 2011년 135건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 양상은 비슷한데, 내용 면에서 보다 강력하다. 출범 초기부터 한 정당을 종북세력의 원흉으로 여겨서 내란음모사건을 조작 하고 끝내 해산시켰다. 최근 국보법 사건은 녹취록, 출입경 기록, 중국통화내역 문서, 사진 등 공신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외국 자료들이 증거로 활용되면서, 기본인권이 침해되고 자주적 노선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의 도구가 되고 있다.

통일이 되면 막걸리법의 현실은 어떻게 달라질까. 적대와 불신이 아니라, 통일과 평화가 시대정신이 되면, 한 국가의 보안만 걱정하는 일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단과 부정으로 70년이나 넘게 지내오면서 변화될 가능성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때로는 시대보다 사람이 먼저 변하기도 하고, 사람의 외적인 부분보다 내면이 먼저 변하기도 한다. 이 사건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국보법이 바꾸어버린 한 청년의 삶

국보법 사건이 한 청춘의 인생과 내면의 욕망을 바꾸었다. 어떤 철학자의 말마따나 현대인들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자기도 따라서 욕망한다는데, 김중위도 결국 타인이 자기를 인정해주길 욕망했다. 어려운 철학책을 들고 다니며 똑똑한 대학생으로 보이고 싶었고, 민족과 통일에 대한 관심을 자랑했으며, 군대에서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의식 있는 간부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김 중위는 국보법 재판 과정을 통해서 심연의 인정욕망에 직면하였고, 이제는 그 욕망의 방향을 바꾸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다. 타인의 욕망이 내 것인냥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욕망해 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누구나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욕망하기 나름인데, 우리나라에 가장 결핍된 평화통일을 욕망하는 것이 더 건강한 일이 아닐까.

결국 국보법도 위협적인 존재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면 내가 필요하다는 인정 욕망이 뿌리 깊은 것 같다. 서로 믿지 못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막걸리법의 속성으로부터, 이해하고 믿고 존중하는 평화통일을 욕망하길 바란다. 그것은 꾸준한 몸부림이 필요하고, 혼자 할 수 없다. 다행히도 평화통일 운동을 하는 사람, 단체들 중에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진중하게 한 길 걷는 이들이 꽤 많다. 거기서 따뜻한 위로를 얻고, 바라는 바의 꿈과 희망을 보게 된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http://change2020.org/) 에서 이와 관련한 카드뉴스를 미디어오늘에 보내왔습니다. 바꿈은 사회진보의제들에 대한 소통을 강화하고 시민단체들 사이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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