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를 다수 언론과 정치인들이 ‘태극기집회’로 부르고 있다. 올해 3·1절엔 탄핵반대의 뜻으로 오해를 살까봐 태극기 게양을 하지 않는 시민들과 태극기 나눠주는 행사가 취소되는 등 태극기를 멀리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번 정국이 끝나면 태극기의 의미가 변질된 채 굳어질 가능성도 있다.

태극기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지만 국가주의나 국가에 대한 복종을 뜻하기도 한다. 태극기는 조선말기인 1882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국기를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이 청과 분리된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는 의미로 탄생했다.

태극기가 민심의 상징이 된 건 1919년 3·1운동 때다. 조선총독부 추산으로 총 100만명의 조선인이 일제에 저항했고, 가슴속에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해방 후엔 헌법정신이 됐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역시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오랜 기간 태극기는 저항과 진보의 상징이었다.

▲ 1987년 6월항쟁을 상징하는 그림.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경찰을 향해 저항하는 시민의 모습뒤로 태극기가 보인다.
▲ 1987년 6월항쟁을 상징하는 그림.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경찰을 향해 저항하는 시민의 모습뒤로 태극기가 보인다.

태극기의 의미를 변질한 세력은 유신정권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학교에서부터 강요했다. 독재세력은 태극기를 통해 국가주의를 강요했고, 언제든 국민이 선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부를 국가와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강조한 애국심 이면에는 독재를 정당화하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최근엔 이명박 정부 이후 독립청산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싸움 중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태극기에 담긴 두 가지 역사,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재미화의 역사 중 전자를 지우려는 시도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고, 탄핵반대 집회에 태극기를 동원하는 것 등은 모두 같은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는 태극기의 의미를 변질시키는데 일정부분 성공했다. 연합뉴스와 전남매일 등 보도에 따르면 춘천·광주 등에서 지난 1일 태극기 게양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탄핵반대의 뜻으로 오해될까봐 아예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은 것이다. 3·1절이면 연례행사였던 태극기 나눠주기 행사가 취소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 삼일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광화문 광장 앞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를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탄핵기각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삼일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광화문 광장 앞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를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탄핵기각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탄핵반대 집회참가자들 일부가 시민이나 취재진을 태극기로 폭행하기도 했고, 계엄령을 주장했다. 헌재 재판관이나 특검 수사관들이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4·19와 6·10항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서울광장이 시민들로 가득 찼고, 태극기도 등장했지만 내용은 전혀 달라졌다. 태극기가 반민주적인 집회의 수식어가 됐다.

‘태극기’만 극우 세력에게 빼앗긴 건 아니다. ‘애국’이라는 말도 이미 뺏겼다.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제국주의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시민들은 극우 세력에게 ‘애국시민’, ‘태극기’를 빼앗겼다. 북한에게 ‘인민’이나 ‘노동’과 같은 좋은 말을 빼앗긴 것처럼 말이다.

언어는 자주 사용하면 뜻이 굳어진다.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충분히 뜻이 변할 수 있다. 3·1절행사나 촛불집회엔 세월호 리본을 태극기에 달아 민주주의의 뜻을 기리는 시민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 언론은 박 대통령 탄핵반대를 주장하는 집회를 ‘태극기집회’로 표기한다. 정치인과 시민들도 태극기집회로 부르고 있다. 촛불은 미군 장갑차에 죽었지만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던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부터 줄곧 민주주의와 인권을 상징했다. 촛불을 들었으니 촛불집회라 부르는 것과 태극기를 들었다고 태극기집회라고 부르는 건 배경과 의도가 다르다.

범죄혐의가 있고, 헌법을 훼손한 세력이 태극기와 애국이라는 좋은 단어 뒤에 숨고 있다. 차라리 ‘친박집회’, ‘탄핵반대집회’가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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