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좋게 말하는데 왜 이렇게 예민해?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지 마.”
“오히려 그럼 네 편을 잃는 거 아니야? 잘 설득해야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누군가를 설득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말들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듣다보면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누군갈 설득해야할까”라는 회의감이 들고 힘이 빠진다. 설득되지 않은 이들을 보며 좀 더 친절하게 말했어야했는지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던 이들도 이런 과정을 겪었다. 예민하고 공격적인 사람 취급을 받았고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다가 애인과 싸웠다는 이들이 ‘속출’했다.

설득에 지쳐갈 때쯤 ‘입을 트이게’ 해준다는 실용서가 나왔다. 2016년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저자 이민경, 이하 ‘입트페’)은 출판을 위한 텀블벅 펀딩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목표액을 달성했다.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14 페이지.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14 페이지.
‘입트페’는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며 모든 이를 상대로 한 설득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책은 “상대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느낄 때 이야기해주자”(30p)고, “내가 겪는 차별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상대와 나누는 대화는 나에게 또 다른 내상을 안긴다”(72p)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더 친절하게 말하자”고 주장하는 가운데 “들을 준비가 된 사람한테만 말하자”는 주장은 설득에 지친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그저 끼리끼리, 아는 사람들 하고만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만족하고 끝나버리는 건 아닌가?

24일 서울 공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민경 작가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고민 때문에 지쳐간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민경 작가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린 항상 친절해야했다”며 “이런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만 했고 설득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민경 작가는 “막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은 이렇듯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노동을 하는데 소진돼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입트페’를 쓴 동기를 밝혔다.

▲ 24일 서울 공덕동 한 카페에서 이민경 작가를 만났다. 사진=정민경 기자
▲ 24일 서울 공덕동 한 카페에서 이민경 작가를 만났다. 사진=정민경 기자
이민경 작가는 자신을 20대 페미니스트로 소개했다. 사실상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과 같은 입장이기에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민경 작가는 ‘입트페’를 출판한 ‘봄알람’ 출판사 활동도 하고 있다.

“봄알람 출판사는 저와 제 또래 4명이 만든 출판사다. 우리 독자들 대부분이 20대 여성들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그게 독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입트페’는 현재 8쇄를 찍었다. ‘입트페’ 성공 이후 봄알람 출판사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을 썼고, 2017년에는 ‘참고문헌 없음’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했다.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기록하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텀블벅 후원 기간이 20일이나 남았지만 목표액 2000만원은 이미 다 모았고 현재 5800만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참고문헌 없음’은 펀딩을 한지 5일 만에 5000만원이 모였다. 지난 가을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문단 내 권력구조를 고발하는 운동을 펼쳤는데 가해자들이 역고소를 했다. 그 투쟁을 이어가는 동안 많이 사람들이 지쳐가는 게 보이더라. 지원비용 등이 필요해서 단행본을 준비해서 기록도 남기고, 후원도 하는 프로젝트다. 제작비 빼고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의료 지원으로 들어간다.”

▲ 현재 봄알람 출판사에서 진행 중인 '참고문헌없음' 프로젝트.
▲ 현재 봄알람 출판사에서 진행 중인 '참고문헌없음' 프로젝트. (https://tumblbug.com/baumealame4)
이민경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알리는 ‘전도사’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이미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활동들이다. 이민경 작가는 이를 ‘Empowering’(임파워링, 체제 속에서 사람이나 조직의 의욕과 성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권한부여)이라고 소개했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같은 진영 내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소모된 에너지를 챙기는 역할이 필요한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전략 중 내 역할은 ‘임파워링’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소모가 되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입트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 거고, 반응이 좋았다.”

“내 역할은 임파워링…권위 앞세운 혐오문화 우려”

직관적이고 소위 ‘사이다’(속이 뻥 뚫리는 말)같은 언어로 ‘입트페’는 성공했다. “아무나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 당신의 정신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18p), “말씨를 예쁘게 쓰면 편을 들어주겠다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나?”(123p)같은 직설적인 내용으로 입소문을 탔다.

그렇다고 듣는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이민경 작가는 “트럼프현상을 보고나서도 ‘기분’이라는 게, 너무도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요소라는 것을 알았다”라며 “하지만 아무리 꽉 찬 팩트를 줄줄이 나열하고 논박해도 오히려 그게 싫어서 다른 표를 찍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 진영 내 액티비즘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회유할 수도 있는 것 같다”며 “설득하는 사람에게 친절한 회유만이 유일한 선택이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입트페’의 성공요인이기도 한 ‘사이다’에 열광하는 현상에는 ‘너무 감정적인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따라온다. 이민경 작가는 정보과잉의 시대에 ‘사이다’에 열광하는 현상, 즉 감정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입트페' 펀딩 기간동안 진행되었던 이벤트 이미지.
▲ '입트페' 펀딩 기간동안 진행되었던 이벤트 이미지.
“정보가 너무 많아졌다. 예전에는 정보를 관장하는 기관이 적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정보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가짜뉴스’ 같은 것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나. 이제는 자기 직관으로 정보를 추려내는 시대다. 이게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하기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시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시대 흐름은 감정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을 보는 독자들을 늘렸다. 이민경 작가는 사실이 아닌 것을 유포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지만 이미 모든 이가 감정에 따라 정보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으니 정보를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을 말하되 새로운 독자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이든 반페미니스트이든 직관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만 직관적이고 편향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라 힐러리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민경 작가는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정적이라는 선입견도 있다. 그 자체로 틀리기도 했지만 감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감정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감정’에서 누군가는 완전히 자유롭고 누군가는 매몰되다고 나누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민경 작가는 “가짜뉴스가 문제인 이유는 그 ‘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누군갈 지배하고 혐오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감정을 이용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민경 작가는 감정을 이용해서 누군갈 혐오해도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미국에서 나타나는 ‘트럼프 현상’이나 한국에서 미디어가 부추기는 여성혐오 프레임에도 적용될 수 있다.

“XTM이라는 채널에서 ‘남원상사’라는 프로그램을 곧 방송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굉장히 우려스럽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이 남자가 여자한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문제는 주류 미디어에서 유명세를 가진 신동엽같은 MC가 나온다는 거다. 미디어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연예인들이 여성에게 복수를 하려는 남성들 편을 들어주려고 한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여성혐오를 하는 남자들은 더 기세등등해질 수밖에 없다.

▲ '남원상사' 측이 처음 공개한 프로그램 소개. 이후 프로그램 소개 문구가 논란이되자 해당 문구를 모두 삭제했다.
▲ '남원상사' 측이 처음 공개한 프로그램 소개. 이후 프로그램 소개 문구가 논란이되자 해당 문구를 모두 삭제했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일이다. 커다란 입지를 가진 사람이 ‘백인이 우월하다’고 대놓고 말할 때, 규범이 바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말을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어도 입밖으로는 하면 안된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앞세워 말해주고, 용인해주니까 그 말을 해도 되는 줄 안다. 실제로 미국에서 인종차별적 혐오범죄가 벌어지지 않았나. 혐오를 용인해주는 문화, 굉장히 우려스럽다.”

이민경 작가는 앞으로도 페미니스트들에게 필요한 많은 ‘참조거리’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작가는 “여성들이 살아가는데 힘을 잃지 않고, 지지해줄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내민 ‘입트페’ 책 첫장에 이민경 작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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