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연애, 권력의 암투, 섹시한 음모론 같은 선정적인 방송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연애, 권력, 숨겨진 이야기들을 늘 일상에서 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송이 다른 무엇보다 이런 심리를 무분별하게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물론 시청률 때문이다. 방송의 철학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자극적인 내용은 점점 더 많아진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이 많을까,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이 많을까. 후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역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남녀 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막장 드라마나 청소년을 섹시 아이콘으로 만드는 음악프로그램, 그리고 연예인의 사소한 일상까지 들여다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정글의 법칙이나 삼시세끼와 같은, 요즘 대세인 리얼리티 포맷은 높은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확실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포맷이, 누구에게나 경멸당하는, 빅 브라더가 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정글에 간, 섬마을에 간, 1박2일로 여행을 떠난 출연자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얼마나 중요할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방송에게는. 방송은 오히려 그들의 고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생존하고자,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자 물고기를 잡거나 복불복 게임을 하며 애쓰는 모습이 오늘 예능의 관심사다. 칼바람 속에서 추위에 떨며 라면을 끓여 먹는 그들의 고난을 즐겁게 지켜보는 ‘빅 브라더’임을 방송은 자임하고 있다. 그들이 겪는 이 억압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없다. 끝없는 고난이 목적이라면 목적이겠다. 그들은 사디즘적인 오락의 대상일 뿐이다. 방송이 지루하지만 않으면 된다.

물론 모든 방송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 비전을 찾는, 대안적인 예능프로그램도 있다. ‘뉴토피아(Newtopia)'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은 시청률만으로 수입을 내야하는 민영방송이 만든다는 점이 신선하다. 한국의 방송이 아니라서 다소 아쉬운 점 있지만, 이 프로그램의 관심사는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이다. 뉴토피아는 독일의 민영방송 자트아인스(Sat.1)의 리얼리티 포맷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은 15명의 시민 참여자를 선발하여 반 년 간 한 마을에서 살게 하는데, 이들은 하나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유토피아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마을에 곡식창고 1채와 물, 전기 그리고 가스가 제공되며, 처음 한달간 생활비가 지급된다. 가축도 몇 마리 주어진다. 외출은 허용되지 않지만 방문객을 받을 수는 있다. 이들은 스스로 경제생활을 하며 권력관계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민주정이든 왕정이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잉여가치가 생산되면서 나타나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허용되나, 하루 일정 시간 반드시 모여 유토피아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한 사회를 직접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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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실 당신이 추구하는 삶일지 모른다. 물론 ‘리얼한’ 현실, 다소 차가운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의 방향을, 사회 체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즐기며, 더불어 만들어가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바로 이런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줄 때, 억압적인 빅 브라더가 아닌 인간 가치를 실현하는 시민의 관찰자가 된다.

오늘 우리의 예능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이런 욕구를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가. 자신을, 가족을, 친구를, 나아가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싶은 시청자의 자발적인, 민주적인 욕구를 관찰하고 있는가. 뉴토피아는 예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7%라는 높은 시청률도 기록한 바 있다. 오래전 16세기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오늘 방송의 뉴토피아가 보여주고 있다. 방송의 힘은 이렇게 크다. 한국 예능의 미래적 대안을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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