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백인들의 고급 주택이 모여있던 LA 한 동네의 저택에서 수십여 군데 칼에 찔린 남녀 시신이 발견됐다. 시신의 주인공은 니콜 브라운과 그의 친구 로널드 골드먼. 니콜은 1992년 오렌탈 제임스 심슨(OJ 심슨)과 결혼하고 이혼한 상태였다. 20세기 최악의 형사 재판으로 기록된 OJ 심슨 사건의 서막이다. OJ 심슨은 미식축구프로리그에서 활약해 전설의 선수로 통한 인물이다.

니콜의 시신을 발견한 LA 경찰은 수십분 떨어진 심슨의 집을 찾았다. 살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는데 심슨의 차량에서 혈흔이 발견됐다. 집 근처에서 피가 묻은 장갑도 나왔다. 심슨은 유력 용의자로 떠올랐다. 

심슨의 차량과 집에서 채취한 혈흔의 DNA 검사에서 심슨과 니콜, 그리고 로널드의 피가 검출됐다. 사건 당시 심슨은 손에 상처가 있었다. 정황상, 그리고 증거를 종합하면 살인범은 심슨이었다. 검찰이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심슨은 동료의 차를 타고 도주했다. 고속도로에서 도주 행각은 생중계로 보도됐다.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도주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LA 검찰은 심슨의 유죄를 확신했다. 손쉬운 싸움이 될 거라 예상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술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심슨은 재판 중간 조니 코크런이라는 변호사를 고용했다. 조니는 LA 경찰의 흑인 폭력을 폭로하면서 유명세를 탄 변호사였다.

심슨의 변호인 전략은 살인 사건을 인종차별에 따른 조작사건으로 프레임을 전환해 심슨을 조작의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략은 통했다. 하늘이 도왔다. 초동수사 때 심슨의 살해 정황이 담긴 증거를 발견한 백인 경찰의 과거 전력을 발견했기 때문.

백인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흑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방송 작가 지망생이 백인 경찰을 인터뷰한 녹취록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경찰의 증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녹취록을 확보한 심슨의 변호인은 환호성을 질렀다. 녹취록에는 백인 경찰이 흑인에게 폭력을 쓴 것을 실토하는 내용 뿐 아니라 심슨 사건의 재판장 부인을 모욕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재판의 공정성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몰렸다. 심슨 변호인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경찰이 '흑인'인 심슨의 살해 정황 증거들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프레임을 전환시켜 승기를 잡은 것이다. 언론도 사건 초기 ‘감옥으로 간 미식축구 스타의 몰락’이라는 영상까지 제작하며 유죄를 확신했지만 재판장에 인종차별 문제가 나오자 돌변해 심슨을 피해자로 그렸다.

사실 심슨은 백인에 가까운 흑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곳도 백인들의 고급 주택가였고, 심슨은 평소 흑인에 대한 정체성을 부정한 듯한 발언을 내놓으면서 흑인에게도 인기가 많지 않았다.

문제는 심슨 변호인의 전략에 LA 검찰이 맞대응하면서 인종차별 프레임을 강화시켜버렸다는 점이다. LA 검찰은 재판 중간 흑인 검사를 투입했다. 백인 여성과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검찰은 흑인 검사를 내세워 인종차별 프레임을 깨려고 했다. 하지만 흑인 검사는 온갖 조롱을 받았다. 무늬만 흑인일 뿐 검찰의 장식물이라는 멸시였다.

결국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무죄를 선고 받고 자유의 몸이 됐다. 프레임을 전환시켜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 사건에서 대통령 측 대리인이 쓰는 전략을 보자. 정호성 전 비서관이 최순실에게 대통령 연설문을 포함해 청와대 기밀자료를 최순실에 건넨 건 엄연한 '사실'이다. 최순실 측근은 사정기관 총수의 인사평가 자료를 작성했고, 자료에 나온 인물은 실제 총수가 됐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설립과 운영에 최순실이 개입했고, 청와대가 뒤를 봐줬다는 증거도 쏟아졌다. 심지어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위증하라는 윗선의 증거인멸 시도까지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수조원의 이익을 남긴 삼성의 지분 승계에 국민연금이 동원됐고, 삼성이 최순실 딸 정유라를 지원한 것도 충분히 뇌물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강일원 헌재 재판관이 대통령 측 대리인에게 한 질문에 이번 국정농단 사건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강 재판관은 박근혜 대통령이 두 재단의 설립은 공익에 부합한 재단이라고 주장하면서 비밀리에 청와대가 개입하고, 증거 인멸까지 지시한 이유를 물었고, 대통령 측 대리인은 ‘확인해보겠다’라는 뻔한 답을 내놨다. 

국정농단의 수많은 증거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대리인단은 헌재와 국회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프레임을 전환시켰다. 국회가 탄핵 소추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아 소추안은 무효이고, 헌재가 효력이 없는 탄핵 심판 사건을 가지고 편향적인 재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탄핵이 인용되면 내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협박'하는 대목에선 섬뜩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최순실 재판에서는 '고영태 녹취록'을 내세워 국정농단 사건이 고영태 등 최순실과 갈등을 일으킨 사람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살해 증거가 쏟아졌음에도 인종차별에 따른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던 심슨의 변호인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전략이 닮아있는 이유다.

과연 프레임 전환에 성공시켜 대통령을 조작 사건 피해자로 돌려세울 수 있을까. 프레임 전쟁의 결과가 나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쪽이 이길지 장담할 순 없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되더라도 검찰 수사에서 끝까지 대통령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심슨 사건의 결말은 이렇다.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심슨은 민사사건에서 패소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리고 2007년 심슨은 강도범이 돼 3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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