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선의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초에 착한 권력이나 좋은 정부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감시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권력은 군림하거나 폭주한다. 그게 언론의 역할이고 그래서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법과 제도 역시 선의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설계돼야 한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방송법 개정안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최선의 대안인지 의문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000년 “공영방송 사장이 정치적 영향을 받는 게 안타까웠다”면서 대통령의 KBS 사장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축소해 임기를 보장받도록 했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할 권한을 갖되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지만 애초에 대통령이 공영방송 사장을 내리 꽂는 구조에서 정치적 독립은 한계가 분명했다.

서동구 전 KBS 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 시절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언론 고문을 지냈던 사람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집권 직후 서동구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하자 KBS 노동조합이 거세게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노조가 출근 거부 투쟁과 함께 파업 찬반 투표를 시작했고 결국 서 사장은 임명 11일만에 자진 사퇴했다. 후임으로 정연주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이 임명됐으나 역시 코드 인사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노골적으로 방송을 흔들기 시작했다. 임면권이 임명권으로 바뀌었지만 정연주 KBS 사장이 이사회를 통해 강제 해임됐고 엄기영 MBC 사장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진 사퇴했다.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따르면 김재철 당시 사장이 ‘큰집’에 불려가 ‘쪼인트’를 까이고 난 뒤 ‘좌파 대청소’가 시작됐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해고되거나 비제작 부서로 쫓겨났고 그 자리를 이른바 ‘시용기자’들이 채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약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면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임명권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선의가 이렇게 왜곡될 줄 몰랐을 것이다. 좋은 대통령을 뽑으면 좋은 사장을 내려보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으면 언젠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선의는 원래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라 사회적 가치가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

어떤 대통령이 오든 정치 권력의 간섭을 전면 차단하고 공정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논의의 핵심이다. 정권의 도덕성과 선의에 기대지 말고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게 언론의 본령이다. 권력의 선의에 기댄다면 언제 또 김인규나 김재철, 고대영, 안광한 같은 이들이 다시 내려오게 될지 모른다.

▲ MBC를국민의품으로!공동대책위원회와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는 지난 7일 방송문화진흥회가 위치한 서울 여의도 율촌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과 여당 추천 이사들은 공영방송 MBC를 박근혜 정권의 대변자로 전락시킨 방송 농단의 주범”이라며 차기 MBC 사장 선출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MBC를국민의품으로!공동대책위원회와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는 지난 7일 방송문화진흥회가 위치한 서울 여의도 율촌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과 여당 추천 이사들은 공영방송 MBC를 박근혜 정권의 대변자로 전락시킨 방송 농단의 주범”이라며 차기 MBC 사장 선출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MBC에서는 사장 선임 절차가 진행 중이다. 박근혜 정부와 자유한국당(옛 새누리당)은 MBC를 끌어안고 대선을 치르고 싶을 것이다. 만약 정권이 바뀐다면 다음 정부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이 임명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낙하산 사장의 임기를 보장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이번에 임명된 사장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우파 대청소’라도 할 것인가.

KBS는 여당과 야당이 추천한 이사가 각각 7명과 4명이다. MBC 방송문화진흥회는 6명과 3명이다.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7명과 6명으로 바뀌고 사장 선임에 정족수가 3분의 2가 돼야 한다.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만 근본적으로 정부와 여당의 영향력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구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좋은 사장과 나쁜 사장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공영방송의 사장을 정권이 임명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

독일의 공영방송 ZDF처럼 이사회를 77명까지 늘려 정치적 이해관계를 희석시키는 것도 대안이지만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저널리즘 정신을 꺾지 않도록 외부의 압력을 차단하고 내부의 감시와 견제를 보장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방송법 개정안에 편성위원회 구성과 노조의 참여를 명문화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영방송을 기자·PD들에게 돌려줘라. 독립성이 확보되면 공정성과 공공성은 사회의 감시와 비판으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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