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6일, 한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는 ‘성평등한 세상’이 곧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대다수의 청중은 박수와 환호로 그의 발언에 화답했다. 그가 페미니스트로서 네 번째 약속을 선언하는 순간, 객석에 있던 한 여성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발언을 저지하기 위해 누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 평등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느냔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물었으나 그는 즉답을 회피했다. “왜 이 성평등 정책 안에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몸부림치며 물었으나 그는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고만 했다. 장내에는 “나중에, 나중에”라는 연호가 넘쳐났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다. 언론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첫 마디를 힘주어 보도했다. 성소수자 여성의 외침을 알리는 매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문 전 대표의 지지자를 주축으로 일부 누리꾼들은 그녀의 발언을 두고 ‘공식적인 발언권을 얻지 않고 이야기했다’, ‘발언을 도중에 끊는 것은 사안을 떠나 예의가 아니다’ 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나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부분은 그의 페미니스트 선언도 그녀의 외침도 아니었다. 나는 문 전 대표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직후 꺼낸 문장에 주목했다. “과연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월1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한국시설안전공단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월1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한국시설안전공단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행동하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꿔왔다  

문 전 대표가 페미니스트의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논하기 전, 20세기 페미니스트들이 겪은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려 한다. 20세기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 중 있었던 일이다.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은 정당 내 여성조직을 꾸려 우호적 남성 정치인의 당선을 위해 헌신하거나 참정권 법안 ‘발의’를 위해 의원들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남성 정치인은 이를 외면했고 운동은 침체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보다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정치 회합에 찾아가 중요한 발언의 순간마다 “여성에 투표권을 달라”고 외치며 화두를 던졌다. 여성 참정권 보장에 미온적이었던 자유당 후보들에 대한 대대적인 낙선운동에 나선 것이었다.  

1905년 가을, 자유당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참석하는 대규모 집회에 여성들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성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레이 경은 정중한 말투로 답했다. 집회가 끝날 무렵, 애니 케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객석에서 일어나 물었다. “자유당이 정권을 잡으면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절차를 밟을 것인가요?” 그레이 경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 가까이 앉아 있던 남자들은 그녀를 거칠게 끌어 앉혔다. 

질서가 회복되자 깃발을 들고 있던 그녀의 동료가 일어나 다시금 되물었다. “자유당이 정권을 잡으면 여성에게 투표권을 줄 것입니까?” 그레이 경은 또 다시 질문을 무시했다. 군중의 폭력 행사로 소매가 피로 물들 때까지 여성들은 버티고 외쳤다. “질문이요! 질문이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합니다!”

이후에도 여성들은 끊임없는 질문과 행동에 나섰다. ‘떠드는’ 여성들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불법과 폭력을 일삼는 고양이들’ 따위의 표현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여성들은 단호히 말했다. “노예가 될 바에는 반역자가 되겠다.” “우리는 법을 만드는 사람이다.”  온 몸이 발가벗겨짐 당하고 잔혹한 강제 급식의 당사자가 되는 순간에도 여성 참정권을 외쳤다. 

익숙한 풍경이다. ‘나중에’라는 날선 외침을 지켜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투쟁의 산물이 삶을 위한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인 것에 반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뽐내기 위한 장신구쯤으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문 전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은 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성평등을 주장하며 성소수자 여성을 배제하는 모습은 ‘양성평등’이라는 고질적인 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 2016년 6월6일 오후, 서울 홍익대 걷고싶은거리 광장에서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모두의 1차 공동행동'이 열렸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사진=이하늬 기자
▲ 2016년 6월6일 오후, 서울 홍익대 걷고싶은거리 광장에서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모두의 1차 공동행동'이 열렸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사진=이하늬 기자
‘티타임 테이블’은 누가 엎었나

문 전 대표는 생각해보라. 5·18의 역사와 가치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자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수호자라도 된 듯 연설하는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민주시민’이 있을까. 예의를 찾기 어려웠던 주체는 성소수자 활동가가 아닌 문 전 대표 본인이었다. 

의제를 떠나 정치인이라면 당사자의 삶과 현실을 파악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능력이 필수다. 소수자와 약자의 삶은 소수자와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화의 ‘티타임 테이블’을 먼저 뒤집어엎은 사람은 성소수자가 아닌 ‘정치인 문재인’이다. 지난날 자신이 직접 약속했던 차별금지법과 동성커플 파트너십 제도화를 스스로 짓밟고 스스로의 정치적 무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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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그를 페미니스트라 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차별금지법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며 페미니즘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언어임을 알린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여성만의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여성, 양성애자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 등 성소수자 여성도 페미니즘 품 안에 있다.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국가/민족/지역, 인종, 피부색, 언어,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 

아울러 페미니즘은 어떤 기준과 잣대로도 차별이나 억압,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그들 역시 여성과 함께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연대하고 투쟁하며 지금까지 나아왔다. 차별과 페미니즘은 양립할 수 없다. ‘배제하지 않음’, 그것이 페미니즘의 출발이다. 이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페미니스트는 존재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문 전 대표와 민주당은 이미 숱한 과오를 범해왔다. 참여정부의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시작으로 박원순 시장의 시민인권헌장 폐기, 수차례의 차별금지법 발의 철회 등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절망으로 성소수자의 존엄은 헤질 대로 헤졌다. 

우리는 저항할 것이다. 쉴 틈 없이 떠들 것이며 소란을 피우고야 말 것이다. 답을 얻을 때까지 물을 수 있는 것은 민주시민이 가지는 권리다. 그러므로 시민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다. 촛불의 뜻을 잊지 말라.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때가 왔다. 나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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