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모여도 제대로 보도되는 곳 못 봤죠? 태극기집회 인원은 축소되고 촛불집회 인원은 부풀려질 겁니다. 우리에겐 신문도 지상파도 종편도 없습니다. … 우리가 모두 언론이 되면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애국 혁명을 일으킵시다!”

“지금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전쟁입니다. 광화문 촛불의 목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아닙니다. 국가전복입니다!”

“탄핵 무효! PC 조작!”

서울 시청 앞 광장 태극기 집회에서 등장했던 구호나 발언의 공통점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다.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국면에서 조중동을 포함한 대다수 보수언론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자 친박·극우세력의 ‘설계자’들은 대응논리가 필요했다. 이들은 언론을 사태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우선 “탄핵 촛불을 보면서 2008년 광우병사태를 떠올렸다. 촛불에는 대선 불복종 심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이한우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는 식으로 촛불을 규정한 뒤 2008년 촛불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MBC ‘PD수첩’의 조작보도를 주장하며 MBC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퍼부은 것처럼 JTBC ‘뉴스룸’의 조작보도를 주장하고 있다.

▲ 지난 4일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 연합뉴스
▲ 지난 4일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 연합뉴스
월간조선 편집장 출신으로 태극기집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조갑제씨는 박근혜 탄핵국면을 “언론의 난”으로 규정했다. 이는 친박·극우세력에서 이번 사태의 시작점을 2016년 10월24일자 JTBC 태블릿PC보도로 규정짓는 것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조갑제씨는 13일 통화에서 “조선일보를 비롯한 전 언론사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반감이 팽배했다”며 최근 태극기집회 규모의 증가는 “언론의 선동적 보도에 의한 분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조씨는 “조중동과 한겨레가 한 목소리로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쏟아내자 화가 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태극기집회는 언론에 대한 저항운동 성격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성언론은 조작과 선동의 공범집단”이라고 주장했으며, “조중동은 한 번도 박 대통령에게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다”고도 덧붙였다. 조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약점은 최순실이라는 비선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는데 언론보도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며 탄핵 사안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인식은 태극기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과 유사하다. 태극기 집회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언론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노근 전 새누리당 의원은 JTBC 등 언론사들을 가리켜 “쓰레기 언론을 소각로로 보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사회특보인 변희재씨는 9일 한 토론회에서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박근혜정부가 언론을 더욱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지난 9일 자유통일유권자본부의 방송회관 앞 '왜곡·선동 언론 규탄' 집회에서 변희재 자유총연맹 사회특보.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지난 9일 자유통일유권자본부의 방송회관 앞 '왜곡·선동 언론 규탄' 집회에서 변희재 자유총연맹 사회특보.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변씨는 “조선일보는 중앙일보에 버금가는 탄핵의 1등 공신이었고 MBC를 제외한 공영언론은 모두 탄핵세력에 가세했다”며 제도언론을 싸잡아 비판한 뒤 “박 대통령이 공영언론 개혁을 못했다. 종편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포털은 매일 탄핵 선동 기사를 톱에 올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박근혜를 비판한 사실상 거의 모든 대한민국 언론이 ‘언론개혁’ 대상이라는 궤변을 펼쳤다. 대통령 박근혜가 단독인터뷰 대상으로 제도언론이 아닌 ‘정규재TV’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궤변에 힘을 실어줬다.

이들의 궤변은 특히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을 향하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변씨 등 200여명이 서울 평창동 손석희 사장 집 앞으로 몰려가 기자회견을 열고 “손석희를 죽이러 왔다”는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이날 변씨는 “다음 주부터 꽹과리·나팔 싹 들고 와서 아예 (손석희가) 집에서 살 수 없게끔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친박·극우세력이 이 상황을 언론의 조작보도 탓으로 돌리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 성격이 짙다.

▲ 지난 9일 방송회관 앞에서 자유통일유권자본부의 '왜곡·선동 언론 규탄' 집회의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지난 9일 방송회관 앞에서 자유통일유권자본부의 '왜곡·선동 언론 규탄' 집회의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들은 박근혜정부와 우호적이었던 조중동 보수신문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조갑제씨는 지난해 박근혜 탄핵 직후 출간한 ‘언론의 난’이란 책에서 “한시적 특별검사가 현 체제를 끝장내야 한다고 선동하는 중앙일보는 특별검사가 혁명재판소장을 하여 법치와 정치의 중심인물들을 숙청하라고 부추기는 격이다”라고 주장하며 조중동 보수신문을 ‘보수의 적’으로 명명했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 같은 ‘언론조작·왜곡보도’ 프레임이 친박·극우세력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된 것을 가리켜 “한국 언론은 긴 불신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허위·왜곡보도의 주체로 언론을 설정 했을 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을 비판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배신’이라는 개념을 주입하기에 이르렀다. 뉴데일리 주필 박성현씨는 ‘탄핵 폭동의 주인공’으로 아예 홍석현, 방상훈, 김재호 등 조중동 사주 이름을 언급했다. ‘홍석현 대선 출마’라는 그럴듯한 풍문도 보수신문의 ‘배신’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됐다. 변희재씨는 조중동이 탄핵대열에 동참한 배경으로 “좌익세력에 거부당했던 콤플렉스”를 꼽기도 했다. 

▲ 자유한국당으로부터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은 윤상현 의원이 지난 9일 오전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집회' 지지 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 자유한국당으로부터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은 윤상현 의원이 지난 9일 오전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집회' 지지 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이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지지층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문화적 상징으로 태극기를 선택했다. 태극기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집단기억의 소환 장치다. 최근 12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선 1983년 작 ‘아! 대한민국’이란 노래가 울려 퍼졌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란 가사는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문화적 장치였다. 결국 태극기 집회의 관념은 ‘조작·왜곡보도→탄핵→좌파의 국가 전복→대한민국 위기’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잃어버린 낡은 구호의 반복이다. 낡은 구호의 반복은 태극기로 소환된 구체제의 집단기억이 쏟아내는 ‘최후의 발악’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광주에 인공기가 걸려있다’, ‘이희호 여사가 닥터 드레와 결혼했다’ 같은 가짜뉴스는 태극기의 세를 늘려나가는 일종의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넷 정보제공자가 사용자에 맞춰 개인화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뉴스수용자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춰 필터링 된 정보만을 접하게 된다는 ‘필터버블’도 이들에게 무수한 확신과 동기부여를 제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거짓정보가 실제 뉴스처럼 쉽게 유통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라면 진위가 어떻든 일단 공유하는 ‘순진한 심성’들이 더 큰 문제”라고 밝혔다. 태극기집회 참가자들 중 상당수는 어쩌면 이런 ‘순진한 심성’을 갖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이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깝다. “이 비극을 부추기며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2월13일자 JTBC ‘뉴스룸’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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