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

중국 남북조 시대, 유신이라는 사람이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는데 그 사이에 나라가 망해서 파견온 나라에 눌러앉게 됐다. 높은 벼슬을 받고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유자산집 징주곡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음수사원’은 취지와 달리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네 월급을 주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라”는 발목 잡는 경고가 될 수도 있고 “이런 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또는 거꾸로 “이런 물이라면 마셔서는 안 된다”는 자기 규율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물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핵심은 “생각 없이 받아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최소한 약수인지 독수인지는 살피라는 이야기다.

50년 전 박정희가 5·16장학회(지금의 정수장학회) 장학생들에게 내린 휘호의 글귀가 버젓이 MBC 사옥에 걸려 있고 MBC 경영진은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50년 전 박정희가 5·16장학회(지금의 정수장학회) 장학생들에게 내린 휘호의 글귀가 버젓이 MBC 사옥에 걸려 있고 MBC 경영진은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로비에도 이 글귀가 걸려 있다.

MBC 사장 안광한은 지난 2014년 9월 MBC 상암동 사옥 이전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글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MBC는 상암 시대를 열면서 국익과 국민생활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을 다짐합니다. (로비 액자에 걸려 있는 음수사원은)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뜻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안광한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 정수장학회 장학생 모임인 청오회 소식지 청오회보 창간호에 보낸 휘호.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 정수장학회 장학생 모임인 청오회 소식지 청오지 창간호에 보낸 휘호.
‘음수사원’은 1967년 박정희가 정수장학회 장학생 모임인 청오회 소식지 창간호에 보낸 휘호의 글귀였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뒤 부산일보 회장 김지태에게 누명을 씌워 이듬해인 1962년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다. 부일장학회는 MBC 주식 100%와 부산일보 지분 65.5%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언론 장악과 친위 그룹 결성의 두 마리 토끼. 역사학자 한홍구는 “몸값을 뜯어내 그 돈으로 장학금을 줬다”고 평가했다. 부일장학회가 5·16장학회가 되고 정수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MBC의 2대 주주로 남아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구속된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이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돈을 주는 사람이 ‘음수사원’을 이야기한다면 그 의미는 뭘까. MBC는 왜 정수장학회에 걸린 그 글귀를 따서 굳이 1층 로비에 걸어놨을까.

MBC PD 출신인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환균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마디로 ‘네가 받은 장학금 어디서 나왔니’ 하는 거다. 과거에 이 ‘음수사원’이 MBC 정동 사옥에도 걸려 있었다. 네가 받는 월급 어디서 나오니? MBC 선배들은 그때 느꼈던 모멸감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도망쳤는데 (새 사옥에 오니) 또 ‘음수사원’이 걸려 있는 거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 공영방송의 본분을 잃고 정권의 친위대 순장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 MBC라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이 마시는 그 물은 어디서 왔는가. 안광한은 시청자 여러분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시청자들이 MBC에 바라는 건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라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언론의 사명은 ‘음수사원’과 거리가 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을 이야기하고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면 된다. 물을 가려 마셔야겠지만 그게 누구든 물을 주는 누군가에게 충성해서는 안 된다. 안광한이 말한 국익이나 국민 생활이 아니라 오로지 진실에 복무하면 된다.

지금 국회에 계류돼 있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법률안은 공영방송의 이사회 구조를 여야 7 대 6으로 바꾸고 사장 선임에 이사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영방송 사장이 자신을 뽑아준 정치 권력에 ‘음수사원’하지 않도록 여야 합의를 제도화하는 방안이다.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가 지난 3일 사장 선임 절차를 시작한 것을 두고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혼란스러운 정권 말, 대선을 앞두고 또 다른 김재철과 안광한이 3년 임기를 시작하려는 순간이다.

멀리 내다 볼 필요도 있다. 현실적으로 법 개정은 멀고 당장 사장 선임을 막기는 쉽지 않다. 당장 낙하산 사장을 막는 것도 절박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영방송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도록 제도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단순히 이사 비율을 바꾸고 사장 선임의 정족수를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제작과 편성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외부의 개입을 차단하는 공영적인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정권이 바뀐다면 바뀐 정권과 싸워야 할 과제다.

그때야 비로소 ‘음수사원’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이다. 더러운 물이면 마시지 말라고, 언론의 본분은 누구에게든 충성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물어뜯고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공영방송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벼리고 다짐하게 하는 준엄한 경고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MBC 당신들이 마시는 물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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