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일이다. 수능을 치고, 가, 나, 다군으로 나누어 지망하는 대학과 학과에 지원서를 썼다. 어느 학과를 지원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중에는 지금 재학중인 북한학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지원한 학교와 학과들을 메모해두셨다. 그런데 다른 학교와 학과는 그 이름 그대로 적어두시고는, 유독 북한학과에 대해서만 ‘북-’이라고 표기해놓으셨다. ‘북-’. 아버지가 나의 지망 학과를 메모하던 그 순간에 북한학과는 왜 ‘북-’이되었을까. ‘북-’은 뭘 의미하는 걸까. ‘북-’은 도대체 뭘까.

북한학도로 약 5년을 보내면서, ‘북-’의 정체가 조금씩 밝혀졌다. 북한학과 단체티를 입고 버스에 타면, 심심찮게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로 쏠린다. 자세히 보기 위해 가방을 들추어보는 분들도 계신다. 단체티를 입고 거리를 걸을 때, 누군가 뒤에서 “김대(김일성종합대학)다니세요?”하는 해괴한 질문을 한 일도 있었다. 한 선배는 지하철에서 전공 서적을 읽다가 웬 할아버지에게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고 등짝을 맞았다고 하며, 학과 학우가 전공 과제를 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다 사이버수사대에 덜미가 잡혀 경찰서에 출두되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들려왔다.

같은 학교의 학우들도 북한학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학교에 그런 과가 있어요?”하고 놀라며, “그 학과에서는 뭐 배워요?”하고 물어온다. ‘뭐 배워요’가 정말 무엇을 배우는지에 대한 궁금증만을 함축한 의문은 아닐 것이다. 이설주가 누군지 아느냐는 둥, 장성택이 왜 죽었냐는 둥, 북한에 핵무기가 몇 개냐는 둥의 질문은 애교다. 조금 친해진 사람들은 친밀함이라는 관계성 뒤에 살짝 숨어서는 “북한 추종하고 그래?”, “위험한거 아냐?”, “빨갱이학과야?”하고 물어온다.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내가 북한학과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간부와 선임들은 ‘북괴학과’라고 말하며 깔깔거렸다. 인터넷에 북한 관련 글을 몇 번 기고한 적이 있는데, 댓글은 정말 가관이었다. 시민으로서 나의 존재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모님까지 들먹여졌다. 악플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편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이것이 ‘북-’의 정체였다. 그건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북-’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만연한 적대감, 총체적 무지, 사회적 배타성, 그러면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는 묘한-韓-친밀감, 필연적인 운명공동체 의식, 궁금증 따위의 것들이 온데 뒤섞여있는 복잡한 무언가. 나보다 인생을 훨씬 오래 사셨던 아버지는 ‘북-’의 정체를 나보다 훨씬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북한학과를 ‘북-’이라고 기입한 아버지의 표현은 그야말로 정확했다. 때때로 누군가 나에게 학과를 물어오면,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번쯤 머릿속으로 굴린다. ‘북-’.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 또한, 아마도 ‘북-’에 대해 마냥 심심한 반응을 보이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나는, 말하자면 북한학과라기보단 ‘북-’에 있는 사람이다.

“온 나라가 최순실이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운데, 당장 우리 앞에 있는 건 저거라고, 저거.”

안보견학차 강원도 철원에 들렀을 때다. 날은 추웠고, 분단 한반도의 최전선이라는 것을 시위하듯 호국훈련이 한창이었다. 철원에 들어서면서 가장 처음 본 모습은 군인들은 도로에 벌벌떨며 서서 차량운행을 통제하고있던 모습이었다. 자주포들과 병력을 실은 군용 차량들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신철원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고석정으로 이동하는 길, 앞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군용 트럭 ‘두돈반’ 을 보며 택시기사는 푸념하듯 내뱉었다. 철원평야 저 편에서는 쾅, 쾅 포탄소리가 울렸다.

그해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철원의 군대에서는 지뢰폭발 사고가 있었다. 지뢰를 밟은 병사는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휴전국에서 태어난 죄일 것이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지뢰를 발로 걷어차다가 목숨을 잃거나 하는 일은 전방지역에는 비일비재하다. 전쟁이 끝나고 60년도 더 되는 세월이 흘렀으나, 변한 것은 크게 없다. “우리 앞에 있는 건 저거라고.” 그게 단순히 철원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안보관광을 하는 길에 관광안내사는 힘주어 강조했다.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켜낸 어르신들에게는 감사를, 나라를 이끌어갈 세대에게는 격려를 주어야 합니다.” 나라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땅덩어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뿐인가, 관광안내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 가서 설명을 들은 후, 내가 북한학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안 군인은 내게 질문이 없냐고 물었다. 북한학과라면 더 많은 질문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군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이 조그만 전망대에서 질문이랍시고 할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북한학과라는 이유만으로 말을 걸어주었음에 고마워하면서, 앞에 있는 강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했다. “저 강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을까요?” 군인은 ‘아니’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북한이나 통일, 혹은 분단에 대해 보다 심화된 사유를 기대한다. 누군가는 투철한 안보관을, 누군가는 깊은 평화관을 기대한다. 단순히 북한학과에 있는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탈북민 관련 단체에서 일을 하거나, 북한 관련 연구소나 부서에서 근무하거나, 여하튼 북한이나 통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북한에 대한 만연한 적대감, 총체적 무지, 사회적 배타성, 그러면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는 묘한-韓-친밀감, 필연적인 운명공동체 의식, 궁금증 따위의 것들이 온데 뒤섞여있는 복잡한 무언가’에 항시적으로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쓸 것이고, 누군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단순히 ‘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그 누구라도, ‘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 많이, 더 자주 요구되거나 그렇지 않을 뿐, 누구나 북한이나 통일에 대해 특정한 사유를 요구받고 있다.

2015년 말 국정교과서 논란이 한창일 당시, 새누리당 당사 앞에는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렸다. 나는 그 현수막을 보자마자 대번에 칼럼을 하나 써서 인터넷에 기고했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현실은 부당하며, 오히려 그런 현실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사실을, 마치 주체사상을 내면화하고 믿기 시작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의 지나친 발현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는 말도 북한 앞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장하는 것은 전혀 이성적이지 못하다. 반응은 꽤나 뜨거웠다. 물론, 악플도 많이 달렸다.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는 문구는,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주체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명확히 인지한 가운데 만들어진 문구다. 그러한 현실을 당리당략에 맞게 악용한 것이다. 흔히 ‘북풍’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 정치의 풍토는, 그 효과가 무척이나 확실하므로 지금껏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나서 시작된 박근혜 퇴진 시위 초기에 평화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던 것도 ‘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평화롭지 못하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 버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향해 던져졌던 ‘프락치’라는 말이다. 프락치의 의미가 ‘전문시위꾼’, ‘선동가’, ‘폭력주의자’, ‘종북세력’ 등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은 구태여 자세히 짚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초 북풍은 북한이라는 존재의 위험성을 각인시킴으로써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이른바 ‘안보위기 결집효과’를 극대화하고, 동시에 반대세력을 흔들기 위한 보수 기득권층의 전략이었다. 1997년의 총풍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북풍은 주도하는 자가 뚜렷했던 전략이었다. 그러나 북풍은 점차 전략을 넘어, 온 나라를 휘감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구조처럼 굳어지고 있다.

탄핵 소추안이 기각되고 난 후,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는 탄핵심판에서 박근혜는 또 한 번 북풍을 이용하고자 했다. 탄핵심판에서 박근혜의 대변인인 서석구 변호사는 촛불집회에서 불린 노래의 작곡가가 김일성 찬양 노래를 만든 전력이 있다며, 촛불집회는 민심이 아니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항마였던 문재인을 향해, 북한에 의견을 물었던 종북주의자라는 식의 주장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자 몇몇 언론들은 박근혜가 2005년에 김정일에게 썼던 편지를 공개했다. 김정일을 ‘위원장님’이라고 부르거나, 남북이 아닌 ‘북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위원장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박근혜를 소개함으로써 북풍의 방향을 오히려 박근혜에게 돌리고자 했다.

북풍을 박근혜에게 돌리고자 했던 현실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북풍이 단순히 북한이라는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하는 수준을 넘어, 어떤 형태로든 북한과 관련되거나 북한에 친밀감을 표하는 행위를 경계하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그 어떤 평화적 사유와 행위도 배척된다면, 평화통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헌법마저도 경계대상이 된다. ‘북-’에서 살아가는 나와,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한반도 남쪽의 모든 시민들은 분단의 옭아맴 속에서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의 남성들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2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거나, 여성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치졸한 이유로 차별을 당하거나, 전방의 주민들이 지뢰사고를 당한다거나,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북한이 동해와 서해 어업권을 중국에 팔아넘겨 우리나라 어민들이 어획에 피해를 입었다거나, 그 결과 꽃게나 오징어의 가격이 폭등하거나, 개성공단이 폐쇄되어 한동안 교복 공급량이 수요량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교복 대란이 있었다거나, 하다못해 북한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는 사실이 있다거나, 하는 현실보다 더욱 심각한 현실이 닥치고 있다. 북한학과를 ‘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더욱 가혹해졌다는 것, 과거에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과 실험을 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조차도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제는 ‘북-’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들조차 배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단은 강하다. 그러므로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강해야한다. ‘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념과 사상은 달랐을지언정,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북풍이 거세지는 오늘날에는 노력의 스펙트럼이 상당부분 소실되고 있다. 이래서는 평화적으로 분단을 넘어서는 일은 점차 불가능에 가까워지기만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단은 강하다. 그러므로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강해야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를 우리 손으로 제한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여전히 ‘북-’의 한가운데 선 채로, 언젠가 ‘북-’이 아니라 평화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꿈꿔본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http://change2020.org/) 에서 이와 관련한 카드뉴스를 미디어오늘에 보내왔습니다. 바꿈은 사회진보의제들에 대한 소통을 강화하고 시민단체들 사이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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