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이 불 붙은지 이제 3개월이 지나고 있다. 이 3개월 동안, 평상시의 3년보다 더 의미있고 중대한 일들이 벌어져 왔다. 그토록 단단하게 뭉쳐있던 보수우파가 이처럼 심각하게 분열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새누리당 해체하라’는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됐고, 쪼개진 새누리 안에서도 다툼이 계속됐다.

그 틈을 비집고 수많은 내부고발들이 터져 나왔다. 보복이 겁나고 눈치가 보여서 입을 닫고 있었던 사람들이 고발과 폭로에 나섰다. 권력의 상층부에서 벌어진 추악한 행태들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오늘은 또 누가 어떤 폭로를 했을지 기대하며 저녁 뉴스를 틀었고, 지배자들은 이것을 ‘국정혼란과 마비’라 불렀다.

촛불이 3개월 동안 이룬 성과는 놀라운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두려울 게 없었을 권력 최고 실세였던 자들이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차야 했다. 반세기 가까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이 나라를 쥐락펴락한 김기춘의 구속은 십년묵은 체증이 내려갈 정도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정책들에도 일부 걸림돌이 생기고 제동이 걸렸다. 교과서 국정화는 정상적 추진이 불가능해졌고, 사드 배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합의는 갈수록 종이조각이 되고 있다.

특히 부산 소녀상 설치를 막으려던 정부가 결국 항복하는 과정은 극적이었다. 주변 강대국들인 미국이 후원하고 일본이 압박하는 데도, 한국 정부는 민심을 거스르지 못했다. 촛불혁명이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세력 관계에도 변화를 강제한 것이다.

무엇보다 촛불혁명은 참가자들 스스로를 변화시켜 왔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냉소를 보였던 사람들 속에서 뜨거운 관심과 토론이 생겨났다. 가족모임은 정치 토론장이 됐고, 부당한 일에 침묵하지 않고 용기있게 목소리를 내는 ‘사이다’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정치지형 자체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여론조사에서 자신을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급증하고, ‘보수’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급락했다. 다음 대선에서 진보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응답은 그 반대 응답보다 압도적이다.

아직 부족하지만, 촛불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 혐오·차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등장한 것도 분명한 전진이다. 이것은 2008년 촛불항쟁 때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특징인데, 강남역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투쟁이 여기에 기여했을 것이다.

촛불의 요구가 박근혜 퇴진·구속을 넘어 재벌총수 구속으로 발전한 것도 고무적이다. 초기만 해도 광장에서 재벌총수 구속 구호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재벌총수 구속은 핵심 요구가 됐고, 이재용 영장 기각은 촛불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촛불은 삼성과 재벌이라는 박근혜 게이트의 몸통뿐 아니라, 김기춘과 공작정치라는 머리까지 두들겼다. ‘김영한 업무일지’는 헬조선의 핵심 두 축이 정경유착을 통한 재벌특혜와 더불어 국가기관이 관여한 공작정치라는 점을 보여 줬다.

▲ 사진=최창호 작가
▲ 사진=최창호 작가

마치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간첩조작을 일삼으며, 재벌과 유착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듯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선부정, 간첩조작, 내란음모 조작, 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진 문제에 국정원, 검찰, 헌재가 연루돼 있었다.

‘김영한 업무일지’에 이틀에 한 번꼴로 전교조와 진보당이 언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촛불혁명이 발전해 가면서 재벌이라는 몸통만이 아니라, 공작정치라는 머리에까지 칼을 겨누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재벌 몸통과 공작정치 머리를 겨누다

이처럼 투쟁의 양적 발전이 질적 도약으로 이어질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230만이 결집한 11월초를 거치면서, 투쟁이 더욱 급진화하며 체제의 몸통과 머리를 향해 나갈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알다시피 탄핵은 투쟁의 성과이자, 이런 사태의 발전을 막고 싶었던 지배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아래로부터 열기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법제도의 틀로 가두어 그 열기를 어떻게든 식히려는 것이었다.

탄핵의 이런 양면성은 지난 한달 동안 거듭 드러났다. 한편에서 탄핵은 박근혜를 쫓아내고 싶은 대중의 열망을 반영했다. 국회 청문회에서는 민주당만이 아니라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박근혜를 공격했다.

공안검사 출신과 김기춘의 후배 등으로 이뤄진 특검도 거침없이 박근혜를 찔러댔다. 박근혜와 손잡고 진보당을 해산시킨 헌법재판소까지 박근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이 기구들의 성격이 변화했다기보다는, 아래로부터 거대한 압력이 선택을 강제한 것이다.

동시에, 탄핵은 우파 지배자들이 일단 한숨 돌리고 전열을 정비해 반격을 시도할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친박 우파와 비박 우파는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간판교체와 신장개업을 시도하며 부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권한대행 황교안은 이런 우파 지배자들의 구심점이 돼 주고 있다.

황교안은 박근혜가 추진해 온 ‘국정’의 중단을 최소화하며 ‘안보’를 고리로 조금씩 우파 재결집과 반격을 노리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노동자의 책> 대표를 구속한 게 대표적이다. 이것은 촛불혁명을 ‘종북세력의 난동’이라고 보는 공안세력이 여전히 국가기구 핵심에 또아리 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아직 겨울공화국이 봄으로 넘어가진 않은 것이다.

반격의 절정은 이재용 구속영장 기각이었다. 이재용은 명백히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중대 범죄자’로 구속수사가 원칙인데도 구속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의 원칙이 ‘유전무죄’로 뒤바뀐 셈이었다. 이 기막힌 소식이 전해진 새벽에 삼성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물론 삼성재벌 총수를 감옥 문 앞까지 끌고 간 것은 촛불혁명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재용 영장 기각은 촛불혁명이 아직 이 체제의 몸통을 제압할 수준까지는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냈다.

경찰의 집회 차단에 제동을 걸며, 촛불을 편드는 듯 하던 사법부에서 이재용의 보디가드가 나타난 것도 시사적이다. ‘팔다리는 일부 쳐내야겠지만, 몸통을 건드릴 수준으로 나가는 것은 막아보자.’ 이것이 상층부 권력자들 사이에 형성된 위기의식과 공감대로 보인다.

이것은 지배자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몸통에 상처를 남기지 않으면서, 우두머리였던 박근혜만 잘라내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뇌물을 받았지만, 이재용은 뇌물은 안 준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박근혜 잘라내기는 두 가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촛불 대중의 자신감과 투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것이고, 지배계급 인사들 속에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번져갈 것이다. 그래서 <조선일보> 김대중은 ‘정치권이 합심해, 박근혜가 명예를 지키며 물러날 수 있는 퇴로를 열어 주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촛불의 열기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더 커다란 모순에서 비롯하는 데, 많은 정치인들이 여기서 허우적대고 있다. 안철수는 왼쪽 기반은 이재명에게 빼앗기고, 오른쪽 기반은 반기문에게 빼앗기면서 추락했다.

반기문은 ‘진보적 보수주의’를 내걸었다가 ‘짬짜면이냐’는 비웃음을 사게 됐다. 우파 지배자들은 차라리 촛불 열기를 무시하고, 핵심 지지층부터 묶어세워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황교안으로 기울고 있다.

결국 촛불혁명은 최고 권력자였던 박근혜를 벼랑 끝으로 몰고, 우파 지배자들을 마비시키며 모순에 빠지게 했다는 점에서 분명 성과를 거두었다. 촛불의 동력과 주도력이 유지되는 한, 박근혜가 탄핵 이후 구속·처벌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탄핵안 통과 이후 촛불이 작아지긴 했지만, 이런 큰 흐름 자체가 뒤집힐 듯하면 언제든지 100만 촛불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있고, 이것이 현 상황을 틀 지우고 있다. 따라서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아 보인다.

물론 박근혜 쪽의 시간 끌기가 성공해서, 헌재 심판 자체가 정지되거나 재판관 수가 7명으로 줄면서 2명의 반대로 기각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자들의 다수는 탄핵 인용말고는 촛불을 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고 있다.

촛불을 가로막을 3가지 가능성

문제는 탄핵 인용이 곧 촛불혁명의 진정한 승리나 완성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박근혜 탄핵과 심지어 구속·처벌이 이뤄져도 여전히 2가지 위험이 존재한다. 먼저 야권의 권력 다툼 속에 우파가 재결집하면서 2달만에 우파정권이 재등장할 가능성이다.

87년에도 연말에 등장한 것은 노태우 정부였다. 지금은 분열해 있지만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은 사실 주요 정책이나 이념, 기반에서 별 차이가 없다. 일종의 ‘위장 이혼’을 한 이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재결합할 가능성은 살아있다.

더구나 우파 재결집을 촉진하는 2가지 객관적 조건이 존재한다. 첫째, 경제 위기의 격화가 지배자들 사이에서 위기극복을 위해 다시 힘을 합치자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기층 대중들 속에서도 우파의 ‘성장’론이 먹힐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둘째, 트럼프의 취임과 역주행이 국제적으로 우파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있다. 트럼프의 대북 압박과 강경책은 북한의 반발과 핵실험 등을 낳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면 우파가 종북몰이를 통해 진보를 분열·위축시키며 재결집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석기 석방 구호에 대한 논란이 보여주듯이 종북몰이는 여전히 우파 지배자들의 히든카드로 남아있다.

물론 더 큰 것은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고, 그 정부가 촛불의 열망을 배신하는 경우다. 지금 우리는 사드 배치 강행에 분노하지만, 이라크 파병과 평택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한 것은 참여정부 때였다. 지금 우리는 이재용 영장 기각에 분노하지만, ‘삼성공화국’ 1기도 참여정부 때였다. 당시 언론, 검찰, 법원, 청와대도 모두 ‘삼성의 또다른 계열사’라 불렸다.

민주당은 박근혜나 우파 지배자들과는 구분되는 중도개혁 세력이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책임을 맡으면 한계를 드러내기 쉽다. 우파의 압박에 굴복하면서, 기층 민중의 요구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이익을 택할 수 있다. 이미 민주당 대선후보들은 ‘사드배치는 돌이키기 어렵다’, ‘이재용 영장 기각 판정을 존중한다’ 등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지배자들도 기층 민중의 불만과 요구를 흡수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줄 ‘방패’로서 민주당 정부를 택할 수 있다. 기층 민중을 향해 휘두를 ‘칼’로서 박근혜를 선택했다가 오히려 87년을 뛰어넘는 투쟁의 폭발을 경험했기에 더욱 그럴 수 있다.

중도개혁 정부의 배신과 실패의 역설은 그것이 우파 득세를 낳는다는 데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이명박 정부를 낳았고, 오바마 정부의 실패가 트럼프 정부를 낳았듯이 말이다. 특히 촛불혁명이 낳은 자신감과 기대가 컸던만큼, 그 역풍은 더 강경한 우파의 등장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좌파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그 위험성은 더 커진다.

따라서 민주당 왼쪽에서 정치적 대안을 건설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도 우파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민주당의 타협과 후퇴도 비판하는 독립적인 틀거리와 목소리가 존재해야 한다.

촛불혁명 속에 함께 했던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의 다양한 단체들은 이를 위해서도 힘을 모아야 한다. 민주당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무비판적인 추종을 하는 것과 민주당 지지 대중에 대한 어떠한 타협과 협력도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야 한다.

결국 어떤 가능성이 현실이 되더라도 촛불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힘과 주도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제도권으로 공을 완전히 넘겨서는 안 된다. 지난 3개월 동안의 중요한 전진은 모두 아래로부터 자발성과 투쟁을 통해 가능했던 반면, 모든 후퇴는 위로부터 제도권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래로부터 폭발하는 투쟁을 기존의 도식에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그 자발성을 더욱 고무하며 거기서 배우려는 자세도 중요하다. 왜 87년 이후 최대의 폭발이 벌어지는 데 조직 노동운동 등은 그것에 앞서고 있지 못한지 돌아보며 낡은 관성을 뜯어고칠 필요도 있다.

종북몰이 속에서 사분오열되고 불신과 앙금을 쌓아 왔던 진보진영의 수많은 단체가 모처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촛불혁명이 낳은 중요한 성과중 하나다.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런 연대의 틀은 유지돼야 한다. 지금의 구조와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서로 이견을 존중하는 열린 토론을 하면서 촛불혁명의 경험을 잘 평가하고 폭넓은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합의점을 찾는 건 항상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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