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알려진 김명순(1896~미상)은 이름조차 낯설다. 소설가 김별아는 장편소설 ‘탄실’을 출간한 이유에 대해 “최초 여성 소설가이면서도 문학사에서 누락된 선배 작가를, 잊힌 사람을 복원해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명순은 당대 극찬을 받으며 등단한 작가였지만 김동인이 소설 ‘김연실전’을 통해 성폭행 피해자인 김명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며 남성 중심의 작가 사회에서 사라져갔다. ‘탄실’은 김명순의 아명이자 필명으로 소설 ‘탄실’은 김명순을 기억하는 작품이다.

김명순은 누구?

1896년 1월 평양에서 김명순은 평양의 지주이자 문신관료였던 김희경과 기생 출신 산월(山月) 사이에서 태어났다. 총명했던 김명순은 1907년 서울에 있는 진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입학 직후 38세 나이로 사망했다. 진명여학교에는 김명순의 이름이 ‘기정’이라고 돼있고 등단한 뒤엔 ‘망양초’ 또는 ‘김탄실’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 김명순 20대 시절모습

1912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가 시부야의 국정여학교를 다녔다. 1915년 7월 동경 아오야마(청산)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 중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훗날 대한민국 최초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강간당한 이후 김명순은 자살을 시도했다. 이게 알려지면서 피해자인 김명순은 학교에서 제명당해 귀국했다. “살기 위해,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문학이라는 동아줄을 잡았다”(탄실, 154쪽)

1917년 11월 김명순은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로 잡지 ‘청춘’에서 기성 작가였던 이상춘과 주요한에 이어 3등으로 당선됐다. ‘청춘’은 육당 최남선이 주간하던 잡지로 심사위원은 최남선과 이광수였다. 이광수는 ‘의심의 소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거기는 교훈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으면서도 재미있고 그 재미가 결코 비열한 재미가 아니요 고상한 재미외다. 이 작품에서 만일 교훈을 구한다 하면 그는 실패되리다”(탄실, 164쪽)

김명순은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여성 해방론자, 제1세대 여성작가로 활동했다. 김명순은 보들레르의 시 ‘저주의 여인들’을 번역하며 ‘누이들’이라는 표현을 여성 중심인 ‘자매들’로 옮겼다. 에드가 앨런 포의 대표작 ‘어셔가의 몰락’이나 ‘고양이’ 등이 아니라 사랑을 다룬 ‘상봉(Assignation)’을 번역한 것은 가부장 질서와 봉건 윤리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작가들의 비난과 왜곡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보이지 않거나 적과 맞붙기를 두려워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적을 만든다.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만만한 상대를 찾는다. ‘안정기’에 접어든 식민지의 작가들은 그렇게 서로를 뜯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없고, 돈도 집도 친구도 없는 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가느다란 목덜미를 드러낸 약적 중의 약적이었다”(탄실, 19쪽)

식민지 시기 문인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보단 김명순을 공격했다. 평양출신 김동인은 화가 김찬영과 함께 고급 기생집을 들락거리는 문인들의 물주였고, 문예지의 출자자였으며, 1920~30년대 조선 문단의 최고 스타 중 하나였다. 그런 이들이 김명순을 ‘문란하다’고 공격한 것이다.

▲ 소설 '탄실'

“소설 ‘김연실전’에서도 김동인의 글재주는 광채를 뿜었다. 문장은 유려하고 세련됐으며 묘사는 정밀하고 감각적이었다. 그래서 그 악의가 정확하게 전달됐다. 비열함과 몰인정과 잔인함이 더욱 빛났다”(탄실, 14쪽)

총명하고 청순한 외모의 김명순은 일본유학 시절 여러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연애했다. 화가 김찬영과 연애했다가 헤어진 직후 김찬영의 친구인 임장화(임노월)와 사귀었다. 친구들 중 김동인은 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는데 ‘김연실전’에서는 김명순의 모교인 진명여학교를 “기생학교”라 불렀다. 또한 김명순이 ‘기생의 딸’이라 성에 일찍 눈이 떴다며 비난했고, 그가 이응준에게 성폭행 당한 사실 역시 김명순의 이런 성향 탓이라고 몰았다.

김명순은 단순히 자유연애자로만 볼 수도 없다. 김별아 작가는 “김기진, 김동인 등이 그를 문란하고 타락한 여자라고 비난했지만 실제로 그의 연애 상대는 겨우 3명”이라며 “탄실은 나혜석, 김원주와 묶여 자유연애주의자로 불리지만 그의 자전적 기록을 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로 사방이 자욱했다. 몽몽하고 맵싸한 가운데 열아홉 살에 리응준에게 당한 강간은 그녀가 타락한 탓이 됐다. 부정한 여자였기에 김찬영에게 버림받았다. 임노월과의 동거야말로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탄실, 237쪽)

친일 장교 이응준은 조선군 사령부에 돌아와 승승장구했고, 김찬영은 유미론을 내세운 예술 비평가로 사교계의 인기인이 됐다. 임노월은 개인적인 이유로 돌연 절필하긴 했지만 훼손된 건 김명순 뿐이었다. 작가 김별아는 ‘탄실’을 통해 어떻게 저항하지 못한 억압이 억울한 약자를 공격했는지, 식민지 작가들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보여준다.

일본 작가의 김명순 공격

조선에 관심 많은 일본 작가도 김명순을 비난하는 글을 쓴다. 1924년 매일신보에 ‘여등의 배후로서’ 즉 ‘너희들의 등 뒤에서’라는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작품을 소설가 이익상이 번역해 연재했다. 이노스케는 일본에서는 입대마저 거절당한 하급인생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평양에서 발간되는 일본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며 고통받는 조선인과 우월감에 취한 일본인의 모습을 보던 인물이다.

소설 속 독립운동가인 권주영의 모델이 김명순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김명순은 충격을 받았다. 소설 속 일본 유학 간 권주영은 하숙집 주인의 동료인 기병 소위의 유혹에 빠져 정조를 유린당한 뒤 버림받았다. 김별아 작가는 “철저히 남성 작가의 남성적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남성 문인들은 이노스케의 소설에 열광했고, 조선 계급주의 문학 운동의 모델로 삼고자 했다.

‘여등의 배후로서’가 매일신보에 연재되기 2주전인 6월 중순 김명순은 조선일보에 자신의 자전소설 ‘탄실이와 주영이’ 연재를 시작했다. 김명순의 작품은 총 29회 연재된 뒤 돌연 중단됐고, 남성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은 ‘여등의 배후로서’는 총 124회에 걸쳐 완재됐다.

“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녀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이지만 탄실이라는 여성은 그 식민지 남성의 또 다른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바깥을 향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폭압에 맞서 내부의 적들과 쟁투해야 했다.”(탄실, 249쪽)

김명순의 죽음

1939년 김동인이 ‘김연실전’을 발표한 후 김명순은 동경으로 건너갔다. 이후 생계를 위한 잡일로 생을 이어갔고, 1945년 해방 소식을 듣고도 돈이 없어 귀국하지 못했다. 생활고로 병들어갔고, 주변에서 정신이 나가버린 김명순을 동경 시에서 운영하는 청산 뇌병원(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김명순을 마지막으로 본 이는 ‘창조’의 동인이자 동창 전유덕의 오빠였던 소설가 전영택이었다. 그는 김명순에게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탄실 김명순이 세상을 떠난 사실은 전영택이 1957년 제29차 세계작가회의에 참석하려 동경을 찾았다가 확인했다. 전영택의 소설 ‘김탄실과 아들’만이 김명순이 YMCA 동경지부 뒷마당에서 정신병에 걸린 채 양아들과 살아간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김명순을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1981년 김상배가 그의 작품을 정리해 ‘김탄실-나는 사랑한다’는 책을 내면서부터였다.

▲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됐고 김명순을 강간했던 군인 이응준

김명순을 연구한 김경애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김명순을 강간한 이응준에 대한 처벌 없이 현재까지 성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었다는 인식은 지속되고 있다”며 “김명순은 데이트강간의 피해자이고 조선사회가 가한 2차적 성폭력에서 생존자로 거듭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했다.

“조선아(중략)/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중략)/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김명순의 시 ‘유언’(遺言, 1924)의 한 구절이다. ‘탄실’은 김명순의 피해를 위로하고 이를 뛰어넘어 그의 문학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담당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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