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4시50분 서울행정법원 지하 209호 법정, 방청석을 메운 스무 여명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임자운 변호사를 지켜봤다. ‘김미선씨의 다발성경화증 발병은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인가’ 이를 판단하는 데에만 4여 년을 끌어온 재판부가 김씨 측에 최후 변론 발표를 요청한 것이다. 임 변호사는 재판부를 설득하기 위해 꼬박 40분에 달하는 발표를 준비했다.

다발성경화증이 전자산업 내 산업재해로 최초 인정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난 17년간 투병해 온 다발성경화증 피해자 김미선씨의 1심 산재 인정 소송이 오는 2월10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관건은 삼성전자·근로복지공단 측 ‘정보 은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다. 임 변호사는 변론에서 “산재 입증이 곤란한 상황 경위에 대해 규범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 변호사가 2013년 5월부터 지금까지 법원 사실조회 요청 실태를 정리한 결과 총 13건 중 정보 제공에 협조한 것은 1건이었다. 모두 김씨의 작업환경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판단하는데 필수적인 정보였다.

▲ 반올림은 11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끝나지 않은 삼성 직업병 계속되는 위험은폐, 과연 영업비밀인가’ 토론회 자료집 중 일부.

삼성전자는 △피해자 취급 물질 이름 및 성분 △작업환경 측정결과 보고서 △삼성 반도체·LCD 공장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 등을 영업비밀을 근거로 공개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공개했다.

ACF 성분 분석의 경우 삼성전자 측은 성분의 92%를 영업비밀로 비공개 처리한 채 재판부에 자료를 제출했다. 제품을 삼성전자에 공급한 업체에 직접 재질의한 결과 업체는 ‘영업비밀이라 답변 할 수 없다’고 답했다. ACF는 김씨가 일한 OLB공정에서 쓰인 화학제품으로 열과 압력이 가해질 때 페놀, 크실렌, 톨루엔 등 발암 물질을 발생시킨다고 알려져있다.

‘삼성 반도체·LCD 공장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는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 양 측이 모두 공개를 거부했다. 보고서는 2013년 고용노동부 장관의 명령으로 실시된 조사 결과로 최근 3년 간 재해 현황을 비롯해 작업환경·근로자 건강관리·보호구 지급 등 현황과 개선방안을 담고 있는 보고서다.

정보 은폐는 산재 입증 판단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뿐더러 재판 진행 속도를 늦춰 온 요인이었다. 2013년 5월 시작된 김씨의 ‘요양불승인처분취소소송’은 선고까지 4여 년이 걸렸다.

임 변호사는 삼성전자, 화학제품 공급업체 등은 재판부의 사실조회요청에 지지부진하게 협조했다고 지적했다. 한 달 여 후에 공개 여부 답변을 주거나 삼성과 공급업체가 자료 제출을 서로에게 미루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한 화학제품 공급업체에 같은 자료 요청을 4회나 반복한 적이 있다. 재판 속도 지연은 매달 치료비·생활비 압박에 시달리는 피해자 측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 사진=반올림 제공

“청소년기 교대근무, 다발성경화증 유발한다”

△교대근무 및 근무 스트레스 유해성 △유기용제 상시적 노출 △복합적 발병요인에 노출 등도 강조됐다.

임 변호사는 청소년기(만 12세~20세) 교대근무가 다발성경화증 발병율을 뚜렷이 증가시킨다는 다수 연구 논문을 제시했다. 김씨는 만 17세였던 199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해 3조 3교대로 근무했다. 바쁠 땐 주야를 번갈아가며 12시간씩 일하는 2조 2교대로 일했다. 1999년부터 2000년 퇴사직전까지 4조 3교대로 근무했다. 김씨는 일주일에 2~3차례 연장근무를 하고 개인별 작업량이 공개돼 성과 경쟁 압박을 받는 등 일상적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LCD 제조라인 중 모듈공장에서 일한 김씨는 상시적으로 유기용제에 노출됐다. 김씨는 OLB 공정에서 중추신경계에 손상을 일으키는 물질인 유기용제 IPA와 아세톤을 상시적으로 취급했다. 모두 패널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용도였다. 김씨는 하루 평균 200~300개 패널을 취급했다.

김씨가 맡은 또다른 공정인 ‘탭솔더공정’에서는 IPA, 아세톤 등 세척용 유기용제 외에도 납땜업무를 위해 납, 플럭스 등 유해물질이 사용됐다. 납은 중추신경계 손상을 유발하는 물질로 분류된다. 김씨가 취급한 플럭스 ‘A90’ 성분 분석을 삼성전자 및 업체 측에 요청했으나 성분 10%가 비공개 처리된 자료가 제출됐다. 김씨는 자신이 노후화된 라인에서 일해 수동납땜 업무를 특히 많이 했고 국소배기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이밖에 유기용제 노출, 교대근무, 납 및 자외선 노출, 업무 스트레스 등 다발성경화증 유발 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돼 온 것도 김씨의 발병을 유발했다는 지적이다.

17년 투병한 김씨, 시력장애로 일상생활 어려워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으면”

최종 변론이 끝나기 전 김씨는 “치료비, 생계비 걱정없이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재판부에 전달했다. 김씨는 현재 국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있으며 치료비로만 한 달 평균 50만 원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와 같이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 판정을 받은 피해자는 김씨를 포함해 총 4명이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은 피해자는 아무도 없다. 공단 측 결정에 불복해 ‘산재를 다시 판단해달라’고 법원의 문을 두드린 피해자는 총 3명이다. 1건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고 또 다른 1건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1997년 6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2000년 6월까지 기흥공장 내 LCD 모듈공장에서 일했다. 다발성경화증은 근무 중이던 2000년 3월 발병했다. 김씨는 입사 당시 삼성전자 측이 실시했던 건강검진도 문제없이 통과했다. 다발성경화증 관련 병력·가족력도 없었다.

다발성경화증은 ‘인구 10만 명당 3.5명이 걸리는’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신체 마비와 시신경염을 수반하는 난치병이다. 17년 투병해 온 김씨도 시신경염 증상이 심화돼 현재 시력장애 1급을 판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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