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화(神話)에는 신격(神格)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비범한 능력을 갖고 민중을 구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박정희라는 신격이 등장하는 신화에 붙들려 있었다. 신화 속 박정희는 객관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숭배의 대상이며 그의 과오는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거나 다 나름의 뜻이 있는 것이다.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신화는 꾸짖어왔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었겠는가?

이 신화는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일부에서 박정희는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를 ‘반신반인’이라 부르며 초상화에 절을 하고,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탄신일’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2017년 마침내 우리는 박정희 신화가 흔들리고 부서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그의 딸을 통해서. 신화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는 최악의 국정농단과 민생파탄이었다. 박근혜의 실패는 박정희의 방식이 틀렸음을 보여줌으로써 신화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어 놓았다.

박정희 신화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완전히 무너질 것인지, 조금 더 버틸 것인지를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촛불집회에 맞서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언론조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화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조차 박정희 신화가 붕괴해가는 과정의 단면이자, 더 이상 신화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눈치 빠른 지자체는 각종 ‘박정희 예산’을 줄이고 있다. 분명 한국사회는 박정희 신화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삼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

그렇다고 ‘신화 없는 사회’가 당장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신화가 있다. 삼성이라는 신화다. 재벌들은 박정희 신화 속에서 ‘하위신격’ 정도로 등장해 한국경제를 일으킨 존재였다. 그 가운데 삼성은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 왔는데, “삼성이 한국사회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세상이 일등만 기억하고, 소수 엘리트가 다수를 먹여 살리며, 불평등은 질서이자, 규제는 악이라는 가치도 퍼뜨렸다. 삼성 총수들은 어떤 부정비리에도 치외법권의 신격으로 군림했다.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훼손하면 한국사회가 경제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가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삼성이 430여억 원을 비선실세 최순실 측에 지원한 사실이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운 대가라는 증거들이 제시되었지만 이재용은 구속을 면했다. 과거 그의 아버지 이건희, 할아버지 이병철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삼성 총수는 구속되지 않았다.

▲ 법원으로 부터 구속 영장 기각 처분을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수십 만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항의하고 수십 명의 법률가들이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을 규탄하는 노숙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이재용을 구속시킬 수 있을지, 삼성 총수로는 처음으로 ‘옥살이’라는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특히 삼성과 이재용을 다루는 수구보수언론들의 보도행태를 보면 아직 삼성 신화는 굳건해 보인다.

삼성 신화의 수호자, 수구보수언론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분노하는 민심이 끓어오르자 수구보수언론들은 박근혜마저 버렸다. 그러나 이들에게 삼성은 여전히 성역이다.

지난 17일 박영수 특검팀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전부터 수구보수언론은 ‘이재용 엄호’에 나섰다. 조중동과 경제신문들, 일부 종편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특검이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 혐의를 입증하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 삼성 총수 구속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특검마저 ‘반기업정서’에 편승해선 안 된다, 이래서야 기업하기 어렵다 등등.

19일 새벽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환영과 훈계가 이어졌다. 사법부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특검의 자충수였다, 특검은 삼성에서 손을 떼고 박근혜와 최순실에만 집중하라! 이런 가운데 공영방송은 눈치나 살피고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JTBC 등 몇몇 언론만이 이재용의 구속 수사가 경제위기와 무관함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한국사회는 삼성이라는 신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민심은 이재용 불구속에 분노하면서도 경제가 더 어려워지기를 원치 않는다. 선한 민심의 불안을 겨냥해 수구보수언론은 “삼성을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 계속 겁을 줄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 신화보다 어쩌면 더 단단한 신화 앞에 있다. 그러나 이 신화를 넘지 못하면 합리성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 1월2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3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재벌해체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시민의 힘은 박근혜 정부를 심판했고 박정희 신화도 넘어섰다.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신화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 누구도 맹신의 대상이 되지 않고, 모두가 법과 제도 아래 보호받지만, 누구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사회. 언론이 신화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다.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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