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선 인연이 없었지만 사후에 세상이 맺어준 두 고인의 이야기. 2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 ‘암살범의 압수리스트-미인도와 김재규’ 편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서 나왔다는 미인도 그림이 진짜 천경자 화백의 것인지에 대해 다뤘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 전 부장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체포됐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김 전 부장을 ‘혁명가’가 아닌 ‘부정축재자’로 만들어야 했고, 이를 위해 김 전 부장에게 나온 물품들의 가치를 과장한 정황이 있는데 미인도라는 그림 역시 천 화백이 실제 그린 것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엔 관과 미술업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박근혜 정부가 위기에 빠진 가운데 박정희를 암살한 김 전 부장을 재평가하려는 의도가 보여 논란이 예상되고 그만큼 많은 관심을 모았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 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은 10.2%(전국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해 그알은 3주 연속 시청률 10%를 돌파했다.

▲ 21일 SBS 그것이알고싶다 방송화면 갈무리

위작 논란은 최근 검찰 수사결과 발표로 다시 논란이 됐다. 지난해 12월19일 검찰은 미인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미인도는 1980년 계엄사령부가 당시 정보부장이었던 김모(김재규) 씨로부터 헌납 받아 재무부,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최종 이관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림의 이동경로를 확인했으니 진품(천 화백이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림이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중정 오아무개 대령이 해당 그림을 1977년 천 화백에게서 받아 오 대령 아내가 김재규 측에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들은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입장이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기회에 (가짜 작품을 보관했다는) 누명을 벗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천 점도 의심해 신용이 떨어지고 국가기관으로서 국민을 볼 낯짝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고 만장일치로 진품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반면 천 화백은 처음 논란이 된 1991년 4월 “허깨비 같고 기가 막히다”며 가짜임을 주장해왔다. 최근 미인도를 다시 감정했던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측은 그알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감정 방식에 대해 “이 방식은 천화백 뿐 아니라 반 고흐나 르느와르 같은 대화가들의 작품도 작업했던 매우 신뢰성 있는 작업”이라며 “미인도가 진작일 확률은 0.0002%”라고 결론내렸다. 검찰은 이 검증방식에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수사에서 이를 배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과 한국화랑협회 측은 감정결과를 뒤집어 미인도가 천 화백 그림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다. 한 관계자는 그알 인터뷰에서 “감정협회에서 감정 엉터리로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밝혔다.

▲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논란을 다뤘다. 사진=SBS

91년 당시 화랑협회에서 미인도를 위작이라고 주장했던 공창호씨는 그알 인터뷰에서 “감정위원장이라는 송아무개씨가 ‘(그림을) 안 본 걸로 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폭로했다. 위작이라 주장했던 공씨는 감정단에서 배제됐다. 

송씨는 그알과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른 제보자에 따르면 송씨는 여전히 화랑협회 실세다. 미인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들어갈 때 이미지를 찍어놓지 않았다. 검찰이 진품이라고 본 근거 역시 뚜렷하진 않다는 뜻이다.

최근 논란은 천 화백 유족 측이 위작 논란에 대해 ‘사자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며 재점화됐다. 검찰이 천 화백의 작품이 맞다는 결과를 내놓아 26년 전 논란이 됐던 상황과 비슷해졌다는 게 유족 측의 반응이다. 졸지에 천 화백은 자신이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유족 측 배금자 변호사는 최근 논란이 기획됐다고 주장했다.

배 변호사는 천 화백이 2015년 세상을 떠나자 진품을 주장했던 이들의 인터뷰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서울시경 정보분실 김아무개 경감으로부터 연락이 와 ‘미인도 조작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공소 사실이 지나 수사를 접었다’며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수사기관에 의뢰하라’고 꽤 구체적으로 제안했다고 전했다. 유족 측은 작품의 진위 여부보다는 명예훼손과 저작권위반 등을 중심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결국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게 수사결과를 끌고 갔다고 지적했다.

그알은 명확하게 진위여부를 가려내진 못했지만 이 사건으로 누가 피해를 봤고 누가 이득을 봤는지를 보여줬다. 천 화백 유족 측은 결국 두 번째 논란에서도 천 화백의 그림이 대통령을 암살한 이에게 부정축재 물품으로 사용됐으며, 천 화백은 자신이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을 뒤집지 못했다.

반면 미술계 분위기는 다르다. 해당 관계자는 그알에 “진위를 검찰에서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밝히며 “수십년간 독점적으로 매주 금요일 어마어마한 물량이 감정을 요청하는데, 진품이라고 할 때마다 엄청난 돈이 들어온다”고 했다. 미인도 논란 자체가 미술품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각하는 계기가 되고, 이 과정에서 화랑협회가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는 이런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이번 방송에서 아쉬운 점은 과거 군부정권들에 대한 거부감을 이용해 필요 이상으로 김재규라는 인물을 부각한 것이다. 김재규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독재정권 핵심 인물이다. 

그알은 김 전 부장 가족들을 인터뷰하며 김 전 부장의 청렴한 이미지를 전했고, 김 전 부장이 마지막에 했던 “제4심이 있다. 하늘이 심판하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없다.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 등의 말을 강조해 ‘혁명가’ 이미지를 더했다. 또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유신헌법이 발표된 후 독재를 끊어야 한다 생각했다는 김재규”라는 내레이션까지 덧붙였다.

▲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논란을 다뤘다.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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